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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6.13 | 조회수 : 109

제목 : 알자지라가 지중해인을 이민자라고 말하지 않을 이유 (2022.06.13)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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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자녀가 아침에 걷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들을 밥 먹이고 옷 입히는 것을 상상해보라. 어린 딸의 머리를 어떻게 묶을지, 아들과 어떤 신발을 신고 싶은가 논쟁을 벌이는 것을 상상해보라. 반대로 그들의 약한 몸을 구명조끼에 묶고 작은 고무배에 태워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상상해보라. 그 과정에서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이야기를 상상해보라. 그리고 그들을 재밌게 할 방법을 생각해 보라. 이처럼 전쟁으로부터 필사적인 탈출을 한 후 당신과 당신의 가족은 “이민자”라고 미디어에 의해 조잡하게 축소되어 분류되었다. 그런 경험을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또한 정부와 언론인이 흔히 사용하는 설명에 반박할 수 있는 목소리가 거의 없다고 상상해보라.

포괄적인 용어인 이민자는 지중해에서 펼쳐지는 공포를 설명할 때 더 이상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사전적 정의에서 비인간적이며 거리를 두는 경멸의 도구로 변질됐다. 이제 지중해에서 배가 침몰할 때 희생자들은 수백명의 사람이 아니고 수백명의 난민 역시 아니다. 그들은 단지 수백명의 이민자로 칭해진다. 그들은 당신과 같이 희망과 역사와 생각으로 찬 사람이 아니고 기차를 지연시키는 철로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이민자다. 우리는 이미 단어에 가치를 두는 것처럼 느낀다. 이민자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만큼 미디어에 가치가 없다. 그것은 용어의 의미 차이에서 기인한다. 용어의 차이는 사람의 인식에도 영향을 주는데 이민자와 난민은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우선 이민자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여 사는 사람을 의미하며 주로 자의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난민은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느낌을 준다. 용어의 표현 방식 차이와 더불어 익사 재해는 점점 뉴스 게시판에서 하단을 차지한다. 우리는 죽은 이들을 개인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졌다. 그들은 단지 숫자로 칭해졌다. 우리가 미디어에서 이처럼 표현할 때 우리는 영국 외무장관이 “약탈하는 이민자”를 언급할 수 있고 증오심 표현과 더불어 은밀하게 가려진 인종차별이 곪아 터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지중해에 빠진 사람들을 대부분 난민이라 부르지 않는 정치적 이유가 있는 정부의 조력자가 된다. 우리는 경제적 이민자만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무게를 둔다.

그렇다면 정치인, 언론과 같은 이들이 난민을 이민자로 지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경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선 난민의 의미를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난민이라 지칭하는 사람들과 국제법이 대상으로 하는 난민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 UN 난민협약에 따르면 전쟁이나 내전, 재난으로 인해 발생한 피란민 같은 경우 엄격하게는 난민에 해당되지 않는다. 국가가 그들을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의도를 가지고 박해한 것이 아니며 단순히 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사회에서는 그들을 모두 난민이라 칭하고는 한다. 이러한 표현방식이 난민 지위의 인정에 혼동을 줄 수 있다.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난민지위 심사에서 통과해야 한다. 난민 협약 체약국은 사회보장을 비롯한 광범위한 복지 범위에서 자국민과 난민을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 이런 내용 때문에 우후죽순으로 이민자도 난민으로 인정해버리면 국가예산에 커다란 손실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이주한 국가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외화 유출과도 관련이 있다. 따라서 언론과 정치인 같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집단은 이러한 점에 기인해 그들을 이민자로 지칭한다고 해안한다. 단순히 모든 난민들을 이민자로 지칭하면 여론에도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들을 포용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심기에 용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럽 해안에 상륙하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 대부분이 돈을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UN에 따르면 이들 중 대다수는 전쟁을 피할 목적으로 조국을 탈출한다. 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22만명에서 3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전쟁에서 사망한 시리아를 탈출하고 있다.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에리트레아, 소말리아 등에서 온다. 지중해에는 “이주”위기가 없다. 상상할 수 없는 비극과 위험을 피해 도망치는 난민이 매우 많고 빈곤에서 탈출하려는 이는 더 적다. 올해 거의 340,000명이 이러한 상황에서 국경을 넘었다. 물론 많은 수이지만 여전히 유럽 전체 인구 7억 4천만명 중 0.045%에 불과하다. 시리아에서만 180만명의 난민을 수용하는 터키와 대조된다. 레바논은 시리아인이 100만명이 넘는다. 내전으로 분투중인 이라크조차도 이웃나라를 탈출한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집이다.

물론 난민 문제에서 쉬운 답은 없고 어느 나라나 난민 수용이 쉽지 않지만 해결책을 찾기 위해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대화의 대부분은 미디어에 의해 형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확성의 이유로 알자지라(Al Jazeera English)의 뉴스 책임자 살라 네그엠(Salah Negm)은 더 이상 이주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적절한 경우에는 난민으로 칭할 것이다. 이 네트워크에서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든 약자들의 목소리가 저널리즘을 통해 대변되도록 열심히 노력한다. 이민자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거하는 단어이다. 이를 난민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최소한 그들의 위치를 돌려주려는 시도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난민의 인정 범위는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따라서 현대 사회의 실태에 기인한 난민 조약의 인정 범위 조정과 같은 방안 역시 필요할 것이다. 


출처: Barry Magdy, “Why Al Jazeera will not say Mediterranean ‘migrants’”, Aljazeera, Aug 20, 2015

https://www.aljazeera.com/features/2015/8/20/why-al-jazeera-will-not-say-mediterranean-migrants

기사날짜: 2015.08.20 (검색일: 202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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