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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8.29 | 조회수 : 248

제목 : 에비앙 협정 60년, 피에누아르는 누구인가 (2022.08.29)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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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3 18, 프랑스 에비앙레뱅에서 프랑스 정부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이 에비앙 협정을 통해 알제리가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했다.

이 평화 협정은 프랑스와 알제리, 두 나라 사이의 협력적인 변화를 공식화했고 132년간의 프랑스 통치 이후 알제리의 완전한 독립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피에 누아르(Pied-Noir) 라는 다양한 구성의 사람 관계,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풀리게 될 지정학적 문제 등 여러가지 문제를 촉발했다.

피에 누아르는 식민지였던 알제리에 정착하여 살던 유럽계 백인들을 말한다. 이들은 주로 프랑스계, 이탈리아계, 스페인계였지만 알제리 내에서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작가, 저널리스트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가장 유명한 피에 누아르 중 한 명인데 그는 노동자 계급의 프랑스 아버지와 문맹인 스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 지배 당시 알제(Alger), 오랑(Oran) 콘스탄틴(Constantine)과 같은 주요 도시에 거주하면서 새로운 알제리를 만들었다. 이들은 가난한 소작농에서 대규모 지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경제적 위치에 있었다. 피에 누아르는 백인 기독교 중심의 프랑스 교육을 통해 노동계급에서 중산층 계급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프랑스 교육을 통해 계층의 상향 이동을 하는 것은 알제리 토착민인 아랍 무슬림인들에게 반감을 일으켰다. 토착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인으로 대우받지 않았고 같은 재정적 또는 정치적 혜택을 받지 못했으며, 지속해서 차별대우를 다 하고 땅을 빼앗겨 내륙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이들은 제한된 영향력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시민권을 얻으려면 무슬림 신분을 포기해야 했다.

이러한 차별적인 상황 속에서 알제리 토착민들은 프랑스에 대한 반감과 독립 의지를 갖췄다. 결국 1954,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이 알제리의 독립을 선포하고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알제리 전쟁이 시작됐다.

한편 전쟁 당시 아르키(Harki) 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알제리계 아랍무슬림 보조병은 프랑스 편에 서서 싸우기도 했는데, 1962년 기준으로 그 수가 총 26만 명이었다.

8년 뒤인 1962 3, 알제리와 프랑스 간의 평화 협정인 에비앙 협정에서 아르키와 피에누아르를 차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데 독립 후에도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알제리 내에서 아르키는 매국노로 인식되어 프랑스로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는데, 이들은 프랑스 사회에서도 이방인으로서 차별받았다. 피에 누아르도 마찬가지인데, 유럽계 백인임에도 긴 시간 알제리에서 살아온 이들이 프랑스나 다른 국가에서 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 속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1, 엘리제 궁전에서의 연설을 통해 피에 느와르 후손들과의 화해를 모색하기로 했다.

올해는 에비앙 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제리 전쟁의 여파는 오늘날까지 프랑스 정치와 사회에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여전히 프랑스와 알제리 사이에는 식민지 과거사 문제로 외교적 긴장감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출처: “It’s been 60 years since Algeria won its freedom and my family lost their homeland. In France, that past is more present than you think”, Mar 12, 2022

https://www.theglobeandmail.com/opinion/article-its-been-60-years-since-algeria-won-its-freedom-and-my-family-lost-a/

기사날짜: 2022.3.12 (검색일: 202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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