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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04 | 조회수 : 228

제목 : [시론] 대러 인식의 ‘프레임’ 전환이 필요한 이유 (2015.10 한겨레) 글쓴이 : 러시아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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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한 지 만 25년이 되었다. 한-러 수교 25년의 경과를 냉철히 결산해 볼 때, 양국 관계가 외연적으로는 꾸준히 성장과 발전을 지속했지만, 내포적으로는 ‘속 빈 강정’처럼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2008년 9월에 합의한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채 ‘선언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이 이를 단적으로 웅변한다.

그렇다면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어디서 오는가? 여러 사유가 있겠지만 한국 사회에 고착된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탓도 크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러시아를 ‘검게 칠하는’ 냉전의 관성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경향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대러 정책에 반영됨으로써 우리의 국익을 훼손했고 한-러 관계 발전을 지체시켜 왔다는 점이다. 이른바 러시아 ‘때리기’로 일관하는 서구 세계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상황에서 한-러 관계가 심화 발전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얻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국제사회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고, 국가이익만 있을 뿐”이라고 갈파한 파머스턴의 경구가 새삼 상기된다. 한국 외교가 역사적 기로에 선 현시점에선 더욱 그러하다. 시장경제국가로 환골탈태한 러시아는 더 이상 철의 장막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거점도, 북한의 후견세력도 아니다. 한국에게 신러시아는 증오와 배척의 상대가 아닌, 오히려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를 넘어서 한국의 총체적 국력 증대와 국제적 위상 제고를 위해 우호적인 협력 작용을 강화해야 할 국가로 변한 것이다. 산처럼 커진 사회주의 중국처럼 말이다.

러시아는 소련의 해체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세계적인 권력보유자다.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사태, 이란의 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보듯 유라시아 강대국 러시아를 배제하고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통일을 논의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세계시장에서 러시아가 비교우위에 있는 첨단과학기술, 에너지, 철도, 전력, 광물, 식량 등은 21세기 한국의 존립과 국가적 번영에 필수불가결한 전략재다. 또 푸틴의 러시아가 유럽연합(EU)에 대항해 형성한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은 한국 경제의 새로운 블루오션이다. 오늘날 러시아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의 외교적 딜레마를 해소하는 출구이자 미-중의 격돌이 야기한 동북아 국제정치의 과도한 민감성을 안정화하는 세력균형자이기도 하다. 이 모두는 박근혜 정부의 핵심 대외정책 어젠다인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잘 반영되어 있다.

한국 외교가 한-미 동맹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상상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 외교의 대상들이 모두 끊임없이 움직이는 목표물이고 동시에 한국 자신도 쉬지 않고 변동하는 행위주체라는 점을 명료히 인식하는 가운데 국제관계에 대한 관성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에 기초한 대외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21세기 러시아가 한국에 제공하는 다중적 가치를 탈냉전의 새로운 조건하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국익 관점에서 인식하고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 ‘내부의 창’이 아닌 외부 세계의 프레임을 통해 인식해온 러시아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지 않는 한 진정한 한-러 전략적 관계의 진입은 요원하다고 본다. 구한말의 데자뷔처럼 최근 동북아를 둘러싼 주변 열강의 파워게임이 날로 격해지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한국에 유리한 이익균형과 세력균형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유용한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외교적 자원으로 동원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수교 25주년이 그 전환점이 되길 기대한다.

홍완석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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