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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09.17 | 조회수 : 1242

제목 : [한국일보] 영어가 권력이다-은행 유학파 임원 10년새.. 글쓴이 : 교수학습개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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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못하면 대기업 임원 되기도 힘들어

영어 잘하는 부총리와 비서실장이라는 조합이 관가에서는 좀체 보기 드문 일이지만, 민간에서는 외국인과 만나 주눅들지 않을 정도의 영어 실력이 ‘잘 나가는 사람’의 필요조건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S그룹은 영어실력이 출세의 절대 기준으로 꼽힌다. 미국 유학파인 A회장 취임 이후 ‘글로벌 마인드를 갖추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수시로 강조하면서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회장이 주재하는 간부회의는 영어로 이뤄지며, 심지어 중국 사업부문에서도 영어 능통자가 우대 받는다. S그룹 관계자는 “모든 승진 심사에서는 영어실력이 중요한 고려 요소이고, 특히 임원이 되려면 내부 영어평가에서 일정 수준을 넘어야 한다”면서 “A회장 취임 이후 영어를 잘하는 유학파가 이전보다 훨씬 많이 중용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어가 출세의 전제조건이 된 것은 재계 전반의 흐름이다.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1995년 전체 상장사 임원 7,890명 가운데 유학파는 668명으로 8.4% 수준에 머물렀으나, 2005년에는 1,296명(13.4%)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외국계 은행에선 한국어가 보조어

금융 및 경영컨설팅 분야에서의 영어 돌풍은 더욱 거세다. 미국에서 MBA 자격증을 받고 외국계 금융기관과 컨설팅 업계에 취업했던 유학파들이 외환위기를 계기로 영미식 체제로 재편된 한국 금융시장과 컨설팅 분야의 새로운 파워그룹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강남 8학군 출신의 부유층 자제들로, 끈끈한 영어 인맥을 형성하며 금융 및 경영컨설팅 업계의 핵심요직을 장악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인 95년 국내 시중은행의 임원 206명 가운데 유학파는 6명(2.9%)에 불과했지만, 2005년엔 152명 중 42명(27.6%)으로 9배 이상 급증했다. 또 95년에 은행권의 외국인 임원은 단 한명이었으나, 2005년엔 전체 임원의 8.5%(13명)나 됐다. 금융권 관계자는 “외국계 자본에 경영권이 넘어간 은행에서는 최고 경영진이 사용하는 핵심언어가 영어이며, 한국어는 보조어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증권업계에서 체감하는 영어권력의 강도도 만만치 않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영어로 분석 보고서를 쓸 수 있는지 여부가 애널리스트를 1류와 2류로 나누는 기준이 됐다”면서 “업계 최고를 지향하는 삼성증권에는 영어로 보고서를 쓰지 못하는 2류가 없다”고 자랑했다. 일반적으로 영어 구사력이 뛰어난 1류와 국내 토종인 2류 애널리스트의 연봉은 20% 가량 차이가 난다.

영어의 진정한 힘이 확인되는 곳은 경영컨설팅 분야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토종 컨설팅 업체들의 독무대였지만, 98년 이후 맥킨지, 액센추어, 베어링포인트, 보스턴컨설팅그룹, 베인&컴퍼니 등 외국계가 대형 컨설팅 계약을 싹쓸이하고 있다. 물론 외국계 회사의 실무진은 대부분 한국 사람이다. 국내에서 학부를 마친 뒤 부모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경영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받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의 한 관계자는 “우리들의 경쟁력은 국내 전문가들보다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본사의 글로벌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컨설팅 업계에서 몸값을 올린 일부 컨설턴트는 국내 기업의 경영진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성낙양 야후코리아 대표, 장윤석 마스터카드 코리아 대표, 유정준 SK㈜ 전무, 이재현 옥션 대표, 이현승 GE코리아 전무 등이 대표적이다.



*외교관 등 관료사회에선 영어권력 대물림

외교관 사회에서는 영어권력의 ‘대물림’ 현상이 뚜렷하다. 부모를 외교관으로 둔 덕분에 국내의 동년배에 비해 외국어와 국제감각을 익히는데 유리했던 외교관 자녀들이 외무고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태식 주미대사와 노무현 대통령의 영어통역인 이성환 청와대 행정관은 부자지간이고,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김병연 전 노르웨이 대사의 아들이다. 홍순영 전 외교부장관, 정태익 전 주러대사, 정의용 전 제네바대표부 대사의 아들도 외교관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외교부 내부에선 ‘황태자 그룹’으로 불리는 ‘대물림’ 외교관들이 북미국 등 요직을 거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고 말했다.

영어의 권력화는 외국어고 입시 열풍과 대학의 편중된 영어 교육으로 이어진다. 고려대는 어윤대 총장 취임 이후 전체 강의의 30%를 영어로 진행하고 있으며, 일부 대학은 국제화를 명분으로 국문학과와 한국사 교수들에게까지 영어강의를 요구하고 있다. 경제전문가 공병호 박사는 “지식 중심사회로 가면서 영어 네트워크로의 편입 여부가 부가가치 창출 능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됐다”며 “한국 사회의 권력과 계급을 구분하는 잣대는 이제 ‘영어’”라고 강조했다.


<한국일보 2006년 03월06일자 고재학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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