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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09.17 | 조회수 : 542

제목 : 광주교대 박남기교수 강의법 칼럼(5)-유능한 소대장과.. 글쓴이 : 교수학습개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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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소대장과 첨단강의: Story Telling으로서의 강의

  나는 박사학위를 마칠 때까지 총 24년간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잘 가르쳤다고 기억되는 선생님들이 몇 분 머리 속에 남아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재수하던 시절에 만났던 학원 세계사 선생님이다. 세계사 선생님의 첫시간 첫마디는 이러했다. “나는 유능한 소대장이 아니어서 군들에게 적이 어디서 나타날 지 미리 얘기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디서 적이 튀어나오든 즉각 사살시킬 수 있도록 군들을 이끌겠다.” 당시 강의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강의의 한 장면이 있다. 선생님이 아편 전쟁을 소개할 때 당시 영국 의회의 회의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신사의 나라가 아편을 팔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측과 실리를 챙겨야 한다는 측이 팽팽히 맞서다가 표결에 들어갔는데 한 표 차이로 전쟁이 결정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한 표의 역사였다”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그러면서 당시 영국의 실정과 유럽의 실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중국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당시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그리고 미국은 어떠한 상황에 있었는지를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주었다. 그 선생님 수업이 끝나자 한 편의 영화를 본 것처럼 아편전쟁을 중심으로 한 당시 세계 상황이 머릿속에서 살아 숨쉬었다. 나는 그 선생님을 통해서 처음으로 세계사가 암기 과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덕분에 재수를 마치고 예비고사에서 세계사를 다 맞았다.
 
  이 선생님이 이렇게 생생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재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던 아편전쟁이야기 뒤에 숨어 있는 수백 페이지 분량의 아편전쟁사를 통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공적인 강의를 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가르치는 내용에 통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벽히 소화되지 않은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덜 익은 술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교수들이 때로는 자기의 전공 분야가 아닌 강좌를 담당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일단 한 강좌를 맡으면 자기 안에서 숙성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재미있는 강의를 위한 각종 기법이나 첫 시간의 노력 등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동일한 강좌를 맡기 때문에 별다른 노력 없이 매년 유사한 강의록을 가지고 유사한 강의를 반복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뚜껑이 열려 알콜 성분이 증발해버린 김빠진 술같은 강의가 될 수 있다. 더 이상 배우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은 고여 썩은 물을 마시는 것 같다는 비유도 있다. 즉, 동일한 주제의 강의를 반복적으로 맡는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인 노력을 통하여 최근의 연구 결과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을 추가시키는 등의 지속적인 관리 노력을 할 때에만 그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오래된 술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시대의 요구와 학생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자신의 연구 노력을 강의 내용에 반영시켜갈 때에만 가르치는 사람도 신명이 나서 자기 강의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노력이 없으면 과거의 명성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보통 첨단강의란 첨단 교육매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강의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 후반 미래사회와 교육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수십회 한 기억이 있다. 미래사회와 교육이라는 주제에 어울리게 파워 포인트 자료를 만들어서 당시 새로 보급되고 있던 빔 프로젝터를 활용하여 강의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직 기계가 좋지 않아 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불을 모두 끄고 나는 원고를 보기 위해 조그만 전등을 따로 켜야 했었다. 이러한 강의를 한 시간 하다보니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중과 눈을 마주칠 수도 없고, 반응을 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불을 모두 켜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586 컴퓨터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향후 100년이 지나도 개발되기 어려울 최첨단 바이오컴과 직접 대화를 나누시겠습니다.” 강의실에 있는 최첨단 매체는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와 프로젝터 혹은 화상강의 시스템이 아니라 바로 강의를 담당하고 있는 교수이다. 교수 한 명을 길러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강의실의 어떠한 첨단 강의 매체 구입 비용보다도 더 높을 것이다. 훗날 나는 미국 CIES 학회에서 카네기멜론대학의 한 교수가 교육공학 관련 발표시 첨단 강의를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앞의 발표자들과 달리 프로젝터를 끄고 분필을 집어드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첨단 강의는 교수가 최대한 활용되는 강의인 것이다. 즉, 학원의 세계사 선생님이 하셨던 강의는 최첨단 강의였던 것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구수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재미있다.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 영화화되었을 때, 감독이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영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 한 우리는 영화에서 소설 이상의 재미를 맛보기 어렵다. 그래서 미래형 강의를 ‘story telling으로서의 강의’라고 하기도 한다. (계속) 
 
<한국대학신문>news@un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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