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62306620

작성일 : 13.06.27 | 조회수 : 1225

제목 : 꽃무늬 바지 구두쇠 사장님은 숨은 '기부 천사' 글쓴이 : 발전협력팀
첨부파일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서울 천호동 박진수씨]

여관 청소부로 사회생활 시작, 갖은 고생끝에 200억 자산가로

평생 술·담배·해외여행 안하며 때마다 독거노인에 쌀 보내고 돈 없는 학생들엔 장학금 지원

"피땀흘려 번 돈 아깝긴 하지만 기부하는 기쁨은 엄청나게 커"

노란 형광빛 셔츠에 꽃무늬 7부 바지, 은색 군모와 빨간색 실크 머플러.

지난 9일 오후 서울 천호동에서 만난 박진수(50)씨의 패션이었다. 그는 이런 옷차림에 노란색 스포츠카를 타고 소방서와 구청 등에 치킨과 피자를 들고 나타나곤 한다. 그는 숙박업(모텔)으로 연 수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다. 서울 천호동과 경기도 성남시에 건물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평생 술·담배·골프·해외여행을 해 본 적이 없고, 29년째 하루 4시간씩만 자며 모텔 카운터 뒤 10㎡(약 3평) 남짓한 방을 사무실로 쓰는 '일벌레 구두쇠'다. 다만 소년소녀가장과 독거노인을 돕는 일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별명이 '괴짜 기부 천사'다.

1994년 서울 신림동 달동네 독거노인들에게 매달 20㎏짜리 쌀을 10포씩 보낸 걸 시작으로 기부 20년차에 접어든 그는 옷차림만큼이나 기부 경력이 화려하다. "텔레비전에서 어르신들이 겨울에 스티로폼을 깔고 주무시는 게 나왔어요. 쌀독을 열었는데 쌀이 한 톨도 없는 거야. 그때 '돈만 벌 게 아니라 누군가를 도와야겠구나'란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

그 뒤로는 매년 신정·구정·추석 때 어려운 이를 도와주라며 쌀(20㎏·100포)과 생활용품을 들고 구청을 찾는다. 여름이 오기 전엔 꼭 어르신들에게 삼계탕을 대접한다. 오는 19일에도 천호동 독거노인들에게 삼계탕 350그릇을 대접하기로 했다. 돈이 없어 공부를 못 하게 되는 학생 소식이 들리면 일단 "내가 돕겠다"고 말하고 본다.

경북 영천 산골 출신인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누나와 남동생까지 삼남매가 어머니가 날품팔이로 벌어오는 돈으론 근근이 끼니를 이었다.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 빨리 돈을 벌고 싶어 1984년 군에 자원입대했지만 일병 때 대형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부러져 의병 제대했다. 1985년 10월, 겨우 걸을 수 있게 된 그는 단돈 19만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월 6만원짜리 하숙집을 구하니까 금세 돈이 다 떨어졌지. 하루에 라면 1개로 버텼어. 아침에 반 개 먹고, 저녁에 불어터진 거 반 개 먹고…." 그의 첫 직장은 경기도 부천의 삼오장여관 청소부였다. 서울 장안동·봉천동 등을 전전하며 여관 당번 일을 했다. 돈을 빨리 벌고 싶어 사업도 빨리 시작했다. 1986년 잔뜩 빚을 얻어 서울 이문동에 방 9개짜리 여관을 열었다. 그러나 장사가 시원찮았고, 1988년 경기도 구리시에서 모텔, 1990년 경기도 성남에서 족발집 등을 열었지만 결국 죄다 망했다. 족발 장사를 접은 뒤론 수중에 100원도 없어 3개월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그러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서울 서초동 보림장여관을 찾아 다시 당번 생활을 시작했다. 장사가 안 돼 주인이 내놓은 이 여관을 그는 또다시 돈을 빌려 인수하고 리모델링했다. '인생을 건 마지막 승부'였다. 7000만원을 들인 4개월간의 리모델링 공사가 끝나자,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매달 1000만원씩 적자를 보던 여관은 3000만원 흑자를 보는 '대박 여관'으로 탈바꿈했다.

그는 200억원 자산가지만 그의 딸(19)은 카페에서 월 20만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들(22)도 의류 매장에서 일해 용돈을 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어디서 알았는지 '아[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 그렇게 고생해서 돈 벌고 기부하는 줄 몰랐어'라며 펑펑 울더군요. 가족들한테도 기부하는 건 비밀로 했거든요." 기부 사실을 알고 난 뒤 가족은 그의 응원군이 됐다. "아내한테 제일 고마워요. 내가 족발집까지 망해 빈털터리일 때 나와 결혼해줬지요. 남을 도울 수 있게 된 것도 아내의 믿음 덕분입니다."

아이들이 안 뒤부터 그는 전처럼 몰래 돈만 보내는 게 아니라 직접 봉사 현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제가 기부하는 걸 보고 한 명이라도 함께 기부하게 되면 좋은 일이잖아요"라면서 "지금까지 4억원 정도 기부한 돈이 모두 피땀 흘려 번 건데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만 기부한 후 느끼는 기쁨이 비교되지 않게 크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5년부터 한 여고생에게 3년간 매년 640만원씩 장학금을 줬다. 홀어머니와 어렵게 사는 모습이 어릴 적 자신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 여학생은 2008년 한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합격 사실을 제일 먼저 알린다며 박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저도 너무너무 기뻤지만 다시 전화하지 말라고 했어요.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다만 '너도 형편이 될 때 너 같은 사람 도우면 된다. 열심히 사는 게 아저씨한테 보답하는 거야'라고 말했지요." 그의 좁은 사무실엔 복지관에 기증할 텔레비전 두 대가 포장돼 있었다.

[조선닷컴 이옥진 기자] 2013-06-14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