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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10.04 | 조회수 : 590

제목 : [배명복시시각각] KAIST의 개혁 실험 성공하려면 글쓴이 : 교수학습개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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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던 사내가 길을 잃었다. 그는 열기구의 고도를 낮추고 지나가던 사내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 땅 위의 사내가 대답했다. “지금 당신은 지상 10m 상공을 비행하는 열기구 안에 있소.” 말문이 막힌 열기구의 사내 왈. “당신, 엔지니어 틀림없군.” 깜짝 놀란 땅 위 사내의 반문.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소 ” “기술적으로는 맞지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말을 하고 있으니 뻔하지 않소.”

술잔에 술이 반쯤 남았다면 사람들은 보통 “반쯤 찼다”거나 “반쯤 비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대 출신 엔지니어는 “술잔이 필요한 용적의 약 두 배 크기”라고 말한다. 주변머리 없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엔지니어나 공대생은 미국식 농담의 단골 소재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지만, 고지식하고 사회성이 부족해 주변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조직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공대 출신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다.

중앙일보가 실시하는 대학평가에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매년 종합 랭킹 1, 2위를 다툰다. 지난주 발표된 2007년 평가에서도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졸업생에 대한 기업들의 평가는 싸늘하다. 채용 때 원하는 출신 대학 10위권에 KAIST의 이름은 없다. 외국어를 포함한 직무수행 능력 평가는 9위다. 리더십과 조직 융화력은 10위권 밖이다.

KAIST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든 서남표 총장이 내년부터 신입생 선발 방식을 성적 위주에서 사회성과 창의성·자기관리력 등 인성(人性)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꾸기로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심각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리더십 마일리지 제도’를 통해 재학생들에 대한 리더십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것도 같은 취지라고 본다.

학생을 잘 뽑는 것도 중요하고, 인성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성이나 리더십은 억지로 가르친다고 해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교육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주목되는 것이 미국 보스턴 근교에 있는 올린 공대의 실험이다.

2002년 개교한 올린 공대는 학생 수가 약 300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대학이다. 뉴욕 타임스 매거진 최신호(9월 30일자)가 조명했듯이 올린 공대의 목표는 팀워크와 창의성, 기업가 정신, 커뮤니케이션 기술, 용기를 갖춘 21세기 엔지니어의 양성이다. 일을 바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이 바른 일인지 아는 엔지니어, 다른 사람들과 팀을 이뤄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엔지니어, 편안한 보통 언어로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엔지니어를 육성한다는 것이다.

올린 공대에는 학과가 없다. 과학·공학, 인문학, 산학협동이라는 세 축을 토대로 짠 통합 커리큘럼이 있을 뿐이다. 학문의 경계를 무시한 수업은 철저하게 프로젝트 위주, 팀 위주로 진행된다. 예컨대 팀별로 ‘골프공 대포 개발’ ‘벽을 기어오르는 로봇 개발’ 등 과제를 준 뒤 필요한 분야를 찾아 스스로 공부하고, 설계에서 제작까지 직접 해보도록 하는 방식이다.

어제의 지식이 내일이 되면 쓸모가 없어지는 세상이다. 졸업 후에도 30~40년씩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은 이제 없다. 현장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 찾아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대학교육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올린의 철학에 미국 기업들이 주목하고 있다.

서 총장은 정년 보장 심사 무더기 탈락이라는 충격 요법으로 교수 사회의 철밥통을 깨고, 2007년 신입생부터 전 과목 영어 강의, 성적 부진 학생에 대한 학비 징수 등 파격적 개혁 조치를 밀어붙이고 있다. 한국의 미래는 유능한 엔지니어의 손에 달렸다고 보는 많은 사람이 금기(禁忌)를 깨는 서 총장의 리더십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제 관심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모아져야 한다. 그래서 “KAIST 출신은 ‘똑똑한 바보’”라는 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 서 총장의 ‘무한도전’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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