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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4.26 | 조회수 : 4448

제목 : [여의도 포럼―박철] 우리만의 세계화와 0.7% 글쓴이 : 전략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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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세계화와 0.7%


어린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에 오래간만에 가 본 사람들은 그토록 넓게만 기억되던 학교 운동장이 갑자기 작아 보이는 현상을 체험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운동장이 물리적으로 줄어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가 커지고 높아진 탓이다. 이렇게 운동장이 축소되는 착시 현상을 필자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느끼게 된다. 하루가 다르게 세계는 작아지고 있고 우리의 국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 세계 42개 외국어를 교육시키는 대학의 총장으로서 5대양 6대주의 어느 한 곳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필자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 버린 세계에 살면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과연 이런 것이 세계화인가  그리고 대한민국은 세계화되었는가 

교통·통신의 획기적 발전과 국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인간과 물건과 정보의 교류는 확실히 '세계화'가 새로운 세계질서로 자리잡았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빈부격차와 인권침해 그리고 폭력은 더욱 심화되었다는 통계는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세계화는 자칫 주변부의 희생을 담보로 한 우리만의 잔치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세계화의 그늘이 정신적 가치가 전제되지 않은 물질주의, 소통이 전제되지 않은 폐쇄주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세계화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하고,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세계화를 통해 진정 없어져야 할 것은 물리적 국경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과 억압이고 이는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우리가 진정 인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궁극의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몇 년 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10차로 대로 옆에 개인용 텐트를 치고 며칠째 농성하고 있는 수백명의 사람을 보았다. 이들이 세운 깃발에는 모두 '0.7%'라는 수치가 적혀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수치는 빈곤국을 돕는 공적개발원조(ODA)의 유엔 권고치였다. 시위대는 스페인 정부가 1인당 국민소득의 0.7%를 가난한 국가들을 돕는데 써야 한다며 농성을 하는 것이었다. 비록 국제기구에 의해 타율적으로 정해진 수치이기는 하지만 이는 소통과 나눔의 정신을 최소한이나마 구현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2006년 통계에 의하면 스페인의 ODA 지원은 0.32%로 OECD 국가 평균과 거의 같았다. 1위 스웨덴은 무려 1.03%를 기록하고 있고 대부분의 북유럽 국가들이 유엔의 권고치를 상회하고 있다. 나눔의 문화가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ODA 지원은 얼마나 될까. 같은 해 통계에서 0.05%였다. 세계 11위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국가로서는 부끄러운 수치다.

며칠 전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돌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50년 전 이웃나라들 원조 덕분에 근근이 기아 상태를 면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경제 규모가 커지더라도 힘든 시절 우리를 지탱시켜 주었던 나눔과 소통의 정신을 잊어버린다면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 진입과 세계화는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IQ가 한 인간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듯 경제력이 국가의 능력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GQ(Global Quotient·세계화지수)는 가진 자의 책무를 잊지 않는 국가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지수가 돼야 한다. 이는 세계를 누빌 우리 학생들에게 강조하곤 하는 글로벌 리더의 필수 덕목이기도 하다.

박철 한국외국어대 총장

(국민일보 200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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