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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6.05 | 조회수 : 6160

제목 : [이덕선 동문] “아메리칸 드림 성공과 나누는 삶”을 향한 旅路 글쓴이 : 발전협력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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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선 ATG 회장]

“아메리칸 드림 성공과 나누는 삶”을 향한 旅路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까지

 

이덕선 회장은 1939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하여 자랐으며,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11.4후퇴 때 강화도 교통으로 피란하여 배고프고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가톨릭 구제회”로 부터 받았었던 구호물자 외에는 먹고 사는 것이 매우 힘들었으며,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1954년에 그의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했고, 1954년에 유일한 가톨릭학교였던 동성중고등학교에 입학하여1958년에 졸업하였습니다. 이후 19583월에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을 6개월 앞두고 돌연 미국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1965년 가톨릭구제회에서 일하면서 고아들의 미국 입양일을 맡았는데 고아 5명을 인솔하여 미국을 갔다 온 후1966, 26세의 나이에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험난한 미국 여정 길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 가톨릭 구제회의 도움을 받아 빈 화물선에 몸을 실을 수 있었고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두주가 넘게 태평양을 횡단한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며 이후 75시간의 긴 미 대륙횡단 끝에 목적지인 워싱턴에 도착하였습니다.

 

워싱턴D.C.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지인의 권유를 받고 컴퓨터 분야에서 프로그래머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곧 이어 “Control Data Corporation(컨트롤 데이터 社)라고 하는 회사에 취직하였는데, 그 회사는 60년대에 고속성장을 이룩한 산업계에서 가장 큰 슈퍼컴퓨터 제작업체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Westat(웨스탯)社 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Westat”社 는 직원이 약 30명인 작은 회사였는데, 그는 유일한 프로그래머였고, 2년간 야간과 주말에도 일을 했습니다. 대학에서 전문적인 컴퓨터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36세가 되던 해인 1976년에 40명 이상의 프로그래머와 시스템 분석가를 고용한 중견기업이라는 쾌거를 이룩한 “Westat”社의 부사장 지위에 올랐습니다.

 

 

1989년에 “Westat”社를 떠나기 까지 부사장으로 13년 간 근무하면서 직원이 3,000명으로 늘어났을 정도로 회사는100배 규모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으며, 그는 이 과정에 헌신적인 노력으로 회사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지금은 사기업ㆍ재단ㆍ주정부 및 지방 자치정부뿐 아니라 미국 연방 정부의 기관들을 위하여 일하는 선도적인 통계자료 조사연구용역 조직 회사로 성장하여, 5,000명 이상의 조사연구ㆍ기술ㆍ행정요원들을 갖추어 그 분야에서는 가장 기업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덕선 회장은 부사장으로써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처음부터 꿈꿔왔던 진정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 크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대우를 잘 받고 아주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인생 최대의 모험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1988121일에 “Allied Technology Group, Inc. (ATG)”라는 기업을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1989년 “Westat”社 에서 직원 6명이 합류하면서 회사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여 1990년에는 80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규모로 발전했고, 매출액이 8,000만달러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메릴랜드 록빌에 본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버지니아 노포크 등 미국 전역에 지사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업 활동으로 이덕선 회장은 200811월 미국 메릴랜드대학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워싱턴DC와 인근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에서 창업하여 기업을 운영중인 소수인종 출신 ‘100대 기업인’에 수여하는 ‘비즈니스 레전드 어워드(Business Legend Award)를 수상하였습니다. 한국계 기업가로는 유일하게 선정된 것입니다. 26세였던 1966년에 도미 후 소수 민족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로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거쳐 드디어 그동안 꿈꿔왔던 아메리칸 드림을 쟁취하는 영광된 순간이었습니다.

 

 

나누는 삶을 실천하다.

 

생활고에 시달리고 하루하루 피곤에 절어 지내던 도미 초기 시절, 70달러 안되는 벌이에도 그는 10달러씩 기부를 실천했습니다.

 

나환자를 돌보는 나자로마을의 운영자금을 모으려고 미국을 방문한 이경재 신부와 우연히 만나 '지금 가진 것을 나누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이덕선회장은 즉시 매달 10달러씩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덕선 회장이 일주일에 6일을 일해 번 돈이 70달러가 채 안되던 때였다고 합니다.

 

이덕선 회장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아는 이경재 신부는 진심이 담긴 10달러에 크게 감동했고, 매달 이덕선 회장에게 '작은 씨앗이 황금 들판을 이루듯 큰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덕담과 감사의 뜻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덕선 회장은 20079월 워싱턴DC가톨릭 대성당에 한국 가톨릭 신도를 상징하는 성모자 부조상을 세울 때 이 회장의 형제들과 함께 20만달러가 넘는 거금을 내놓았습니다. 성모자 부조상 설립과 교황의 미국 워싱턴DC방문에 거액을 낸 것은 집안 내력 덕분입니다. 2006년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서 `교회와 교황을 위한 메달`도 받았습니다. 가톨릭 교도로서는 영광스러운 메달입니다.

 

2009년도 4월에는 세계적인 글로벌 인재 육성을 위해 모교인 한국외대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한국외대에 총130만 달러를 기부하여 조국인 대한민국의 미래에 기여할 인재 양성에 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 가톨릭대학교에 이덕선,이덕형 형제 이름으로 10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민 가느라 학업을 마치지도 못했지만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이덕선 회장은 회사 직원들이 대학에 진학해도 학비 전액을 댔으며, 대학을 중퇴한 직원의 등을 억지로 떠밀어 학업을 마치게 한 적도 있다고 할 정도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늘 돕고 지원했습니다.

 

이덕선 회장은 미국 이민생활 동안 겪었던 역경을 딛고 미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기업가로 성공하였습니다. 그가 꿈꿔왔던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고 미국의 여러 단체로부터 진정한 기업인으로 인정받는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성공한 삶 이후에도 끊임없이 기부를 실천하여 사회 지도층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 양성을 위해 한국외대와 가톨릭대학교에 거액의 기금을 희사하여 세계적인 글로벌 인재 양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성공을 원하지만 누구나 성공을 쟁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들 모두가 기부를 실천할 것 같지만 성공한 사람들 상당수는 기부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공한 선친으로부터 부를 물려 받아 편안히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 재벌2세의 화려한 삶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오늘날의 부를 성취한 이덕선 회장의 삶이 더욱 위대해 보이며, 많은 젊은이들이 배우고 실천할 만한 귀감이 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보아온 이덕선 회장의 삶을 통해 우리가 젊은 세대에게 가르치고 힘주어 말해 주어야 할 것은 첫째, 자신의 힘으로 건전한 삶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겸손하고 정직한 자세로 세상을 보는 그의 철학이며 둘째, 주변에 있는 어렵고 곤궁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따뜻한 인간미로 함께 살아가도록 배려하고 나누는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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