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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09.20 | 조회수 : 2179

제목 : [국정브리핑]“3불, 이름은 별로인데 내용은 좋아” 글쓴이 : 교수학습개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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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불, 이름은 별로인데 내용은 좋아”
국정브리핑 | 기사입력 2007-09-17 12:11

 

지난 세기 한국경제 성장의 돛이었던 교육은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는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는 ‘덫’으로 표류하고 있다. 산업화시기 유효했던 입시위주의 낡은 교육시스템, 시험성적 중심의 인재선발 방식에 대한 일대 수술의 필요성이 제기된 지는 이미 오래다.

낡은 교육시스템은 갈수록 늘어나는 사교육비와 조기유학붐, 교육이민, 부동산투기 등 교육적, 사회경제적 폐해를 키우고 있다. 우리사회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교육열’에 힘입어 대학진학률이 82%에 달하는 등 대학교육의 대중화를 이뤘지만 질적으로 낮은 대학경쟁력은 국가경쟁력의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고교평준화정책, 대입제도 등을 둘러싼 논란은 계층, 지역간 갈등과 이념투쟁의 양상으로 확대되면서 이미 형성된 사회적 합의를 해치고 교육의 ‘백년대계’를 어렵게 하고 있다.

국정브리핑은 난마처럼 얽힌 교육현안 중 국민적 관심이 큰 ‘대학입시정책’, ‘고교평준화정책’, ‘사교육경감대책’, ‘인적자원개발정책’ 등 4개 분야를 중심으로 지난 교육정책의 역사를 실록형태로 정리한 ‘실록 교육정책사’를 총 16회에 걸쳐 연재한다. 연재를 끝낸 뒤에는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실록 교육정책사’는 교육정책의 탄생배경과 정책효과, 사회적 반응 등을 전·현직 교육정책 담당자들의 증언, 각종 정부기록물, 학계 연구보고서, 언론보도 등을 바탕으로 생생히 재현해냄으로써 ‘읽는 재미’와 함께 교육정책을 이해할 수 있는 폭넓은 안목을 제공할 것이다. 또 21세기 세계화·정보화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교육시스템과 교육이념, 이를 구현할 교육정책의 원칙과 방향 등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

<1부> 대학입시정책
①인재 패러다임 바꿔야 나라가 산다
-(상) “문제는 서울대 정점 대학서열 구조다”
-(하) “서울대 ‘흉내’로는 대학서열 꿈쩍 않는다”
②문민정부~참여정부까지 대입제도의 진화
③‘3불 정책’, 대학자율 속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
④수능, 과연 필요한가 - 국가고사 변천의 역사
⑤다시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를 향해
⑥‘뽑는 경쟁’에서 ‘가르치는 경쟁’으로 대학교육개혁

“3불정책(공교육 3원칙)을 잘 방어해 나가지 못하면 진짜 우리 교육의 위기가 올 수 있다.”

2007년 4월 8일 ‘본고사가 대학 자율인가’라는 주제의 교육방송(EBS) 특강.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학입시제도의 논란 속에 직접 뛰어들었다. “대학입시제도가 우리 교육의 미래를 상당히 위험하게 하고 있다. 3불정책이 ‘대학입시제도에서 세 가지는 하지 마라’는 것이다. 이름을 누가 붙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름은 별로 안 좋지만 내용은 아주 중요하고 좋은 것인데, 여기에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이것을 무너뜨리려는 사회적 흐름들이 계속 있다.”

같은해 6월 26일, 노 대통령은 다시 대입제도 논란의 전면에 섰다. 청와대에서 열린 전국 대학총장과의 토론회에서 “제일 정치적으로 쟁점화되어 있는 것은 본고사 제도”라며 “3불정책의 핵심은 본고사”라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왜 이른바 '3불정책'(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 '공교육 정상화 3원칙')을 지키려 할까.

신군부가 교육계 숙원을 해결하다

공교육 정상화 3원칙의 핵심인 본고사가 철퇴를 맞은 것은 1980년이었다. 그해 7월 29일 오전 9시 정각, 서울 삼청동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회의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중장)은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7·30 교육개혁안)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전 상임위원장은 15가지 지침을 내렸다. 첫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가 과외 관련 내용이었다. “지체없이 실행에 옮기라.” 그는 과열과외를 “전 국가적인 문제이자 사회의 암적 존재”라고 규정했다.

이튿날 국보위는 7·30 교육개혁안을 발표했다. 국보위 설치 2달만이었다. 주요 내용은 ‘본고사 폐지, 내신 도입’이었다. 신군부는 ‘공공의 적(敵)’이었던 “망국적 과외”를 뿌리뽑기 위한 방법으로 본고사 폐지, 내신 도입을 내세웠다. 해방 이후 35년간 대입 제도의 왕좌를 차지했던 본고사가 퇴장당하는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 내신이 들어서는 순간이기도 했다. 대입 제도에 국한하자면 한국교육정책사 60년을 통틀어 가장 전격적이고 충격적인 변화였다.

1980년 7월 29일 당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보고된 7·30교육개혁안 브리핑 자료(왼쪽)와 7·30교육개혁안에 서명한 국보위 위원들의 사인. 맨 윗쪽에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사인이 보인다.

국민들이 “과외 잡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겠다”고 입을 모으던 시절이었으니 신군부가 재빠르게 민심에 화답한 셈이었다. 당시 6개 전국일간지 모두 ‘교육혁명’에 비유했다. 다음날 사설의 제목들은 이랬다.

“새 역사를 창조할 민족교육의 기반을 다진다”(경향신문) “교육정상화의 길”(동아일보) “한국교육의 혁명적 전기(轉機)”(서울신문) “전 국민적 호응을!”(조선일보) “획기적인 교육개혁”(중앙일보) “영단(英斷)적인 교육혁신”(한국일보). 입시학원의 풍경도 하룻만에 달라졌다. “앞날 캄캄한 학원가, 재학생 수강료 환불소동”(동아일보), “접수창구가 환불창구로, 입시학원 전업모색”(중앙일보).

그럼에도 지금까지 본고사를 대학자율과 대학경쟁력의 뜨거운 상징으로 여기는 대학과 언론, 그리고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 내신을 중시하는 정부간의 길고도 격렬한 쳇바퀴 싸움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내신이 대입에서 본고사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본고사 부활하자 “과외시키려 파출부”

이후 본고사가 부활된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91년 발표해 1994~96학년도에 실시됐다.

1991년 대통령 자문 교육정책자문회의가 건의한 본고사 부활 등 새 대입제도 개선안을 보도한 1991년 2월 19일자 중앙일보
발표 첫 날부터 고교를 비롯해 반대 여론이 일었다. 언론들은 “망국과외 이대로는 안 된다”는 시리즈를 내보냈다. 그해 7월 19일자 경향신문 “‘돈이 실력이다’ 고액 전쟁” 기사(요약)를 통해 당시 고액 과외의 한 풍속도를 들춰보자.

“전·현직 교사나 유명학원 강사의 고액비밀과외는 과목당 월 2백만원을 넘어섰다. 명문대학생도 주2회에 100만원이다. 관광회사 최모 사장은 고3짜리 장남에게 국영수와 사회·물리 5과목의 과외를 시키는 데 한달에 800만원을 쓴다. 국·영·수 현직교사의 절반 이상이 부업으로 과외를 한다. 한 학부모는 ‘과외를 못 시켜 대학에 떨어지면 평생 부모를 원망할 것 같아’ 파출부 일을 한다.”

부활이 예정된 본고사가 실시되기도 전에 본고사를 없애야 한다는 게 여론이었다. 50세 안팎의 부장 판·검사들이 과외비를 대기 위해 속속 변호사로 전직한다는 자극적인 사례들이 언론을 탔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즉각적인 본고사 폐지를 미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수험생에게 혼란 주면 안 된다.” 부활 첫 해 서울대 등 9개 대학이 본고사를 시행했다. “본고사를 쳐야 명문대”라는 말이 떠돌았다.

본고사, 부활 3년 만에 사라진 해프닝

1994년 4월 20일. 교수 출신 여야의원 29명이 모인 대학발전연구회(회장 박정수 민자당 의원)가 개최한 제1차 정책토론회. 주제는 ‘대학 본고사 과연 필요한가’였다. 한준상 연세대 입학처장은 ‘대학 본고사, 고교 교육 힘들게 만든다’라는 주제 발표를 했다. 그는 “내신과 수능만으로도 고교 학업성취도가 높은 학생들을 충분히 선발할 수 있다”면서 “본고사는 고교 교육의 기능이나 역할을 철저히 유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가 본고사를 ‘화근 덩어리 종양’으로 규정한 이유는 크게 4가지였다. 고교 교육의 파행적 운영 조장, 재수생 누적과 천문학적 과외비, 학생 정신건강의 악화, 대학입시 자율능력의 약화가 그것이다. 본고사는 그의 ‘예언’대로 부활 3년만에 사라졌다. 본고사의 부활은 입시정책사에서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문민정부 이후 역대 정권은 대학의 자율을 확대해갔다. 하지만 역대 정부는 본고사를 풀기는커녕 금지를 강화했다. 1995년 문민정부는 ‘새 대입제도 개선안’을 통해 본고사 금지를 명문화했다. “국·영·수 중심의 필답고사를 실시할 수 없다.” 훗날 정립된 이른바 ‘3불정책’(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의 ‘제1불’이 탄생한 것이다. 그해 기여입학제 역시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본고사 철폐와 내신도입이라는 극본

물론 문민정부의 본고사 금지는 신군부의 정책과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이다. 신군부는 정권 창출 및 민심 획득 차원에서 ‘과외망국론’의 원흉인 본고사를 없앴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반면 ‘교육대통령’을 자임한 김영삼 대통령 때 만든 ‘5·31 교육개혁방안’은 정치논리가 아닌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인재양성을 고민한 교육정책안이란 점에서 평가를 받는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가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안과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시 돌아가, 신군부가 본고사 철폐를 단행한 내막은 이렇다.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에 교육행정 전문가로서는 유일하게 차출됐던 정태수 문교부 대학교육국장(문교부 차관 역임)의 증언이다.

“본고사 철폐와 내신 강화는 한국교육개발원의 아이디어를 내가 군인의 힘을 빌려 구체화한 것이다. 교육계는 이에 필요한 연구를 이미 했거나 진행하고 있었다. 마침 군인들이 등장해 그간 문교부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었던 숙원사업을 이뤄냈다. 군인들은 정권을 잡기 위해 과외 잡는 입시제도를 요구했다. 그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다 들어주었다. 장기적으로는 내신만으로 대학을 갈 수 있도록 안을 짰다.”

1980년 7월 22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7·30교육개혁안 공청회 모습. 당시 신군부는 과외해소대책으로 본고사 폐지를 단행했다.

군인이 과외 금지라는 제목의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나섰으며 여기에 차출된 교육계 인사들이 본고사 철폐와 내신 도입을 주제로 해서 극본을 썼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건너뛴 입시정책이었던 탓에 훗날 정부와 대학간 다툼의 불씨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문민정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문민정부 때 발표한 본고사 금지는 정치색을 탈색한 뒤 나왔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적 외압을 차단하는 방패막이 역할에 충실했다. 덕분에 “한국교육정책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는 평가를 받는 ‘5·31 교육개혁방안’이 온전한 모습으로 탄생했다. 이를 주도했던 이명현 당시 교육개혁위원회 상임위원(전 서울대 교수, 교육부 장관 역임)의 말이다.

“우리는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어울리는 교육제도에 대해 고민했다. 정보화와 세계화에 발맞춰 교육 전체의 틀을 바꾸고자 했다. 그 결과 ‘한 줄 세우기’가 아니라 ‘여러 줄 세우기’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나왔다. 대입제도를 바꾸는 건 정치권력이 국민을 속이는 권력놀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자기 자식을 아인슈타인 만들고 서울대 보내려 하는데 어떤 제도가 버텨내겠는가.”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어울리는 ‘여러 줄 세우기’ 정신을 입시제도에 적용한 게 본고사 금지와 내신(종합생활기록부) 강화였다. 본고사는 주입식 암기교육과 대학서열화, 그리고 학벌사회의 공고화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대신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과 적성을 나타내는 종합생활기록부를 필수 전형자료로 도입했다. 문민정부의 내신 강화 정책 역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옛 본고사의 자리에 내신을 놓아야 한다는 교육정책적 방향에 관한 한 두고두고 짙은 암시를 던졌다.

1980년 이후 정권이 바뀌고 집권자의 철학이 달랐어도 바뀌지 않은 교육정책, 그게 본고사 금지이다.

유신정권과 신군부의 내신 도입

내신의 역사는 더 길다. 내신은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 직후 단행한 고교 평준화의 정신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기 때문이다.

내신이 전면적으로 도입된 것은 1980년 국보위에서 내놓은 7·30 교육개혁안을 통해서였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지난 7월 펴낸 ‘2008년 이후 대학입학정책 개선 방향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국가 수준에서 표준적으로 대입 전형에 내신 성적을 반영하도록 요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신군부는 현실적으로는 과외를 없애기 위해 본고사를 없애고, 이를 위해 내신을 도입했다. 하지만 당시 발표문에는 그 반대 순서로 적혀 있다. 신문을 펼친 전지 크기의 당시 챠트에는 교육정책의 제1항으로 ‘內申制 實施’(내신제 실시)라는 글자가 반듯하게 쓰여 있었다. 내신 도입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 본고사의 폐지였고, 이를 통해 과외를 잡는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내신에 의한 입학전형으로 전환”이라고 돼 있다. 그리고 내신은 고교 교육의 정상화와 지역간·학교간 평준화에 기여하리라고 기대했다.

7·30 교육개혁안에 아이디어와 연구성과를 제공한 김영철 박사(전 한국교육개발원 교육정책연구본부장)는 “내신제 도입의 정신은 고교평준화를 지향하는 것이며, 이는 곧 고교간 학력 격차를 없애자는 선언이자 설혹 학력 격차가 있어도 이를 무시하여 평준화를 유도하려는 것”이라면서 “고교 교육 평가의 주체를 가르칠 사람(교수·본고사)에서 가르친 사람(교사)으로 옮기는 공교육 정상화 및 교권 확립의 정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내신을 통해 교육 선발 주체인 대학과 고교간 힘의 균형을 이뤄내려 했다”면서도 “정작 교사들이 ‘관리하기가 귀찮고 어렵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내신을 반대하는 등 대학이 내신을 무시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특목고 1등과 시골 1등, 각각의 환경에서 최고

내신의 정신이란 서울 특목고에서 1등을 한 학생과 농어촌 고교에서 1등을 한 학생은 똑같은 내신 1등급을 주는 것이다. 둘은 각각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각각 최고이기 때문이다. 획일적 학력보다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평가한다는 점에서 학벌주의나 서열주의 타파를 위한 가장 적극적인 제도이다.

일부 대학과 언론이 내신 반영을 최소화하면서 본고사와 고교등급제의 부활을 시도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내신의 신뢰도 문제와 지역간·학교간 학력 격차 문제다.

하지만 내신은 우리 사회와 대학으로부터 무시받아도 될 만큼 신뢰도가 낮지 않다는 게 지배적 학설이다. 오히려 내신이 본고사와 수능보다 ‘대학 성적 예언 타당도’가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랐다.

내신 우수하면 대학학업도 우수하다

2003년 한국외국어대가 발표한 ‘입학성적과 학업성취도’ 보고서에 따르면 수능 점수보다 내신이 좋은 학생이 대학공부를 잘 하고 있었다. 2004년 한양대가 발표한 ‘최근 5개년 한양대생의 특성 및 학업 성취도와 주요요인들 간의 관계 분석 보고서’의 결론도 마찬가지다. 대학생들의 학업 성취도(학점)가 수능성적과는 별 상관이 없고 내신성적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에서도 대학 학업적성검사(SAT)보다 고교 성적이 대학 성적과 더 상관관계가 깊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일본에서도 내신이 본고사보다 대학성적과 더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됐다.

국민의 정부가 최종 ‘3불 정책’ 확립

이에 따라 내신 관련 논란은 지역간·학교간 학력 격차 문제로 집중됐다. 현실적인 학력 격차를 내신에서도 인정하자는 고교등급제 실시 주장이 그것이다. 명문대·특목고·강남·부유층·보수언론 관계자들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역대 정부는 공교육 강화 및 평준화 정책을 이유로 고교등급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급기야 국민의정부는 1998년 10월 ‘2002학년도 대학입학제도 개선안’을 통해 “고등학교간 학력차 인정은 불가”라고 명시했다. 이어 2002년 교육부는 ‘대학입학 전형 기본 계획’을 통해 고교등급제 금지를 명문화했다. 이로써 문민정부가 금지한 본고사·기여입학제, 국민의정부가 금지한 고교등급제 등 이른바 ‘3불’이 정립됐다.

초등학교까지 입시지옥으로 만들 고교등급제

도대체 역대 정부가 고교등급제를 반대해온 이유가 뭘까. 고교등급제가 실시되면 시행착오의 사회적 비용을 치르며 지금까지 진보해 온 한국교육정책의 역사가 과거로 되돌아가게 되리라고 예견하기 때문이다. 전교조의 산파인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이 지난 4월 9일 ‘청와대 브리핑’에 기고한 ‘내부 인종주의를 우려한다’라는 제목의 글(요약)을 보자.

“고교등급제 적용과 평준화 해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전국 고교가 서열화된다. 이는 고교 진학을 위한 중학교의 경쟁과 편법의 전면화를 가져온다. 평준화 해제 이전에 등급이 낮은 고교에 입학하는 학생은 내신에서 불이익을 당한다. 그러면 여론의 압력에 의해 평준화가 무너지고 고교 입시가 부활한다. 곧 중학교의 서열화를 불러일으킨다. 그 다음은 초등학교 입시경쟁의 전면화다. 정부가 평준화란 이름으로 가까스로 막고 있는 것은 고교 입시의 부활이다. 현재 입시제도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사람들(특목고·자사고·강남학군)이 평준화 해제, 즉 고교입시의 부활을 통한 중고교의 서열화를 요구한다. 대입에서 고교등급제를 실현함으로써 내신 반영의 불이익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그 일부 집단이 초등학교까지 입시지옥으로 몰아넣어도 좋은 것인가.”

명문고 입학을 위한 과외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자 유신정부는 1974년부터 고교평준화정책을 시행한다. 사진은 1973년 6월 28일 당시 민관식 문교부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교평준화정책 시행 등의 내용을 담은 '고교 및 대입제도 개선방안'을 설명하는 모습
실제 1969년 중학교 입시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국민학생이 입시생이자 과외학생이었다. 명문중 입학은 이후 명문고를 거쳐 명문대에 오를 수 있는 ‘엘리베이터’였다.

당시 상대적으로 여유있는 집 출신의 국민학생들이 집중적인 과외를 받았다. 이른바 ‘KS'(경기중·고-서울대) 라인의 소수엘리트가 한국사회의 최상위 계층을 형성하게 됐다.

이후 중학교 입시가 사라지자 고입 경쟁이 극한에 이르렀다. 고입수험생 세 명 가운데 하나꼴인 30만명이 고입 재수를 택했다. 1974년 유신정권이 고교평준화를 실시한 배경이다.

내신 불신 키운 고교의 내신 부풀리기

고교평준화의 근간인 내신을 번번히 위기로 내몬 것은 정작 고교의 내신 부풀리기였다. 내신 부풀리기는 가르친 사람이 학생을 평가한다는 내신의 취지를 무색케하는 행위여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1999년 서울시내 26개 고교가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는 등의 이유로 재시험을 치렀다. “이같은 사례는 교육계에 전례가 없는 데다 내신 절대평가 대학입시에 대비한 잘못된 제자사랑의 ‘점수 부풀리기’ 현상으로 학교교육의 뿌리조차 흔들고 있다.”(문화일보 1999년 9월 2일자) ‘내신인플레’ 현상으로 수능과 내신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토록 한 2002년 새로운 대학입시제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해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감자료에는 “지난 1학기 동안 전국 1,131개 고교를 대상으로 성적(내신) 부풀리기 실태를 조사한 결과 10.3%인 117개교를 적발했다”고 돼 있다. 이듬해에는 교사들의 89%가 성적 부풀리기를 인정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나왔다. 내신 불신 탓에 “수능 변별력 높여야”(수능 어렵게 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서울대는 ‘심층면접’을 서둘러 도입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고교의 내신 부풀리기와 대학의 내신 불신이라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참여정부의 두 번째 교육부 차관이었던 김영식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사무총장의 회고다.

“2002학년도 대입 개선안은 국·영·수뿐 아니라 다양한 소질과 재능으로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학교생활기록부를 중시했다. 이해찬 전 교육부 장관은 이를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맹점이 하나 있었다. 절대평가방식이었다. 교육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내신 부풀리기로 나타났다. 어떤 교사는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를 가르쳐주었다. 대학의 내신 불신은 곧 대학의 수능점수 의존, 사교육비 급증, 공교육 붕괴라는 악순환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참여정부가 대입제도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상대평가로 바뀐 내신

참여정부는 2004년 8월 ‘2008학년도 이후 대입제도 개선안’을 내놓았다. 내신 위주 입시제도라는 점에서는 역대 정부의 정책 기조를 그대로 따랐다. 학생부의 신뢰도를 높여 대입전형에서 그 활용도를 높일 수 있도록 기존 제도를 손질했다.

‘해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내신을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꿔 성적 부풀리기를 방지했다. 여기에 내신 역사상 처음으로 ‘내신의 실질반영률’을 적극 강조했다. 실질반영률의 강조는 교육정책사에서 ‘내신의 실질화’를 뜻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까지 내신은 외형반영률 위주였다. 따라서 대학이 실질반영률을 낮춰 점수 위주의 수능으로 신입생을 뽑는 관행에 속수무책이었다. 예컨대 2007학년도 서울대의 경우 내신 외형반영률은 40%였으나 실질반영률은 2.28%에 불과했다. 내신의 상대평가와 실질반영률로써 ‘여러 줄 세우기’의 대입제도가 연착륙하는 듯했다.

“고려대, 사실상 고교등급제 준비”

하지만 그로부터 사흘 후, 어윤대 고려대 총장이 “고교간 학력 격차를 입시에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고려대의 경우 수능 성적과 학생부 모두 1등급인 학생들만 지원할 가능성이 커 변별력 확보에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논리였다. 보수 언론은 즉각 3불정책 폐지 논란으로 판을 키웠다.

교육부는 한석수 학사지원과장을 통해 반론에 나섰다. 한과장은 “부정확한 학교차에 의거해 획일적으로 개인차를 인정하는 것은 자칫 ‘대학 진학 연좌제’ 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변별력이 문제된다면 대학이 논술·심층면접 등 다양한 전형방식을 통해 학생의 능력과 잠재력을 평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 즈음 전교조가 “고려대가 3년전부터 고교간 학력격차 자료를 축적, 사실상 고교 등급제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에 대해 연세대는 고교의 내신 부풀리기 관련 분석자료를 언론에 공개, 맞불을 놓았다.

“고교등급제 꼭 막아야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무현 대통령은 3불정책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2004년 9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27회 수석보좌관 회의. ‘공교육 정상화와 학교간 편차를 줄이기 위한 정부의 대책’을 주제로 한 논의가 있었다. 노 대통령은 보고를 들은 뒤 “고교등급제는 꼭 막아야 한다”면서도 “대학과 정부가 서로 균형을 맞추면서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내신의 신뢰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면접과 논술의 본고사화를) 막을 수 있겠는가. 대학의 선발자율권이라는 것이 상당 부분 대국민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대학이 가지고 있는 것을 선용하도록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내신으로 (대학이) 학생 못 뽑는 것은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다 만들어 놓은 것 아닌가. 내신이 완벽하지 않고 불신 받는데 자꾸 대학교 보고 ‘당신들은 구두시험도 치지 말아라. 면접시험도 치지 말아라’ ‘눈 감고 뽑아라’ 하는 건 불공평하다. 내신 9등급으로 자른 것만도 대단한 진보이고, 수능을 9등급으로 자른 것만도 대단한 변화이다. 그런데 이걸 이제 (대학이) 무력화하려고 할 것이다. 이 무력화시키는 것을 최대한 방어해나가야 한다. 학생부의 실질반영률도 내신의 신뢰도와 더불어 조절해가는 것이 과제이다.”

보수언론들은 국가경쟁력 등을 이유로 끊임없이 '3불 정책'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3불정책 폐지 내용을 담은 조선일보(2005. 4. 5), 중앙일보(2005. 7. 2), 동아일보(2005. 11. 3)의 보도
그럼에도 일부 보수언론들은 “좌익 평등주의”와 “교육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다. 2004년 전교조와 시민·사회·학부모 단체 및 여당에서 3불정책 법제화를 요구, 노대통령이 교육부에 검토 지시를 내린 일이 있었다. 보수세력들은 이를 “교육 쿠데타” “교육 소비에트”라고 명명했다.

교육부는 “검토 결과 3불정책은 기존 법 체계에서도 충분히 근거가 있으므로 따로이 법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알겠다”면서 ‘없던 일’로 했다. 3불정책 논란과 관련해 반대세력과 각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지나서였다.

‘3불’ 이라는 언어의 수세적 신세

널리 알려진 대로, 이른바 3불정책은 참여정부의 발명품이 아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정부 때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유신정권이 고교평준화를 단행하고 신군부가 본고사를 폐지하면 로맨스요, 참여정부가 그 정책을 유지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지적이 잇따랐다. ‘3불’이라는 금지의 언어는 대학의 자율이라는 숭고한 가치 앞에서 늘 수세적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실제 대학의 자율은 신성불가침이자 천부인권에 육박하는 고귀한 가치이다. 거기엔 유럽 근대의 여명기부터 지금까지 대학이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체 권력과 싸워온 역사와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대학이 학생 선발의 자유를 갖는다는 점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다. 우리 헌법도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제31조 제4항)고 적시하고 있다.

물론 대학의 책무성 또한 헌법적 가치다. 3불정책, 즉 공교육 정상화 3원칙은 우리 사회가 공교육의 자율을 보장하기 위해 대학에 요구하는 최소한의 원칙과 책무인 것이다. 2005년 이현청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사무총장(현 호남대 총장)은 ‘대입전형 세 가지 최소제한사항의 법제화에 관한 연구’(교육부)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학생 선발의 권한은 분명 대학에 있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교육의 공공성 강조에 따른 대학의 책무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교육 정상화 3원칙’이라는 100년 대계(大計)

과연 노 대통령이 국민 모두가 불만 투성이라는 대입제도의 논란에 직접 나선 배경은 뭘까.

지난 3월 김광조 교육부 차관보가 정리한 ‘3불정책의 정의’에서 그 단초가 엿보인다. “헌법과 교육기본법상에 규정된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학벌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난 50여년간의 경험에서 나온 최소한의 사회적 규약이다.”
다음달 한국언론재단 포럼에서 김신일 교육부총리가 3불정책(공교육 정상화 3원칙) 폐지 논란을 “정치적 쟁점”이라고 규정한 것도 또다른 이유가 될 듯하다. “입시제도야말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왔다갔다 해서는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6월 28일 대학총장과의 토론회에서 '2008학년도 대입제도를 만든 사회적 합의를 함부로 깨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두 달 후인 6월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학총장과의 토론회에서 노 대통령은 대학총장들에게 “2008 대입제도는 2004년 정부, 학교, 학부모 등 당사자 간의 합의로 수용된 것”이라며 “잘못된 것이라면 합의해서 깨야지, 일방적 밀어붙이기로 깨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6년 김진표 교육부총리가 주요 대학을 돌면서 “내신 반영률을 50%까지 올리겠다”는 구두 약속을 받아낸 사실까지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3불정책은 우리 사회가 많은 시행착오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순도(純度)를 높여간 약속이다. ‘3불’이라는 부정적 뉘앙스 탓에 ‘세 가지만 빼고 모두 대학 자율’이란 뜻이 희석되곤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초부터 이를 ‘공교육 정상화 3원칙’라고 명명했다. 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 이것은 과연 “대학 자율의 암초”인가 “공교육 정상화의 최소 원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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