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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8.20 | 조회수 : 441
제목 : [이슈&인사이트] 쾨니히스베르크를 아시나요? | 글쓴이 : EU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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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프로이센 왕국의 동쪽 발트해의 항구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 중심부를 흐르는 프레겔강에는 두 개의 섬이 있었다. 이 섬들에 접근하기 위해서 일곱 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는데, 많은 사람은 '어느 지점으로부터 일곱 개의 다리를 한 번씩만 건너서 원래 위치로 돌아오는 방법'을 찾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른바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라고 부르는 이 한붓그리기 문제는 당시 학자들의 고민거리가 되었는데, 이 문제가 현대 수학의 새로운 분야를 창조하기까지 하였고 통신망 분석과 컴퓨터 회로 디자인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당시 독일 학문의 중심지였는데, 일곱 개의 다리로 연결된 섬에는 대성당과 16세기에 설립된 대학교가 프로이센 왕족, 러시아의 고위 관료, 발트 독일인들이 선호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이 대학교는 중상주의 철학과 신학, 법학 그리고 의학과 수학 등으로 높은 명성을 가졌다.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이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고 평생을 보내며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하며, 칸트가 평생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도시의 역사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트인들이 살고 있던 이곳에 독일계 튜튼 기사단이 요새를 건설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왕의 산'이라는 의미의 쾨니히스베르크는 북방 십자군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으며, 기사단 국가의 수도가 된 이후 프로이센 공국으로 전환되는 16세기에도 국가의 수도로서 발전하였다. 프로이센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통합되면서 수도는 브란덴부르크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정해졌고, 쾨니히스베르크는 동프로이센의 중심도시로 남았다.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긴 후에도 프로이센 국왕들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등 특별한 애정을 가졌다고 한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베를린이 함락당하자, 프로이센의 국왕은 쾨니히스베르크로 수도를 옮기며 프랑스군에 저항하였다. 시간이 흘러 이곳은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진 제국 시대에도 베를린과 함께 독일 제국의 동부 거점 역할을 하였다. 이 도시는 발트해와 폴란드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요충지였고, 러시아로도 연결되는 길목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독일은 파괴된 쾨니히스베르크를 소련에 내주어야만 하였는데, 소련은 이 도시의 이름을 칼리닌그라드로 바꾸었다. 그러나 쾨니히스베르크 당시 독일이 만들었던 항구나 노면전차와 같은 여러 시설은 소련 시절을 거쳐 현재 러시아에서도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발트 3국이 소련에 편입되어 있던 시절이 끝나고 독립하면서, 지금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본토와 분리된 역외영토가 되었다. 이곳은 러시아에 드문 부동항이어서 해상무역에 유리하고 전략적으로도 중요하여, 러시아 해군에서 가장 오래된 발트함대의 본부가 자리하고 있는데, 최근 유럽의 안보 상황을 고려하면, 칼리닌그라드의 중요성을 크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 도시에 많은 영향을 받아온 리투아니아와 같은 일부 유럽 국가들은 최근에 '칼리닌그라드' 대신에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도시의 역사에 나타나는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에 시비를 걸거나 소유권을 논의하자는 것은 아니다. 발트해의 상업적 요충지였던 이곳이 군사적 도시이자 국가의 수도나 제국의 주요 도시로 발전하였으나, 전쟁터가 되고 파괴를 경험하면서 이름조차 사라지는 불행을 겪었다는 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한국의 도시들 역시 전쟁을 겪었던 아픔을 간직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쾨니히스베르크가 사라지고 칼리닌그라드가 되는 이야기는 한국인에게는 생소하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도시의 성장과 발전이 갈등과 전쟁을 부르고 파괴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한국의 도시들을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해야 할 숙제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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