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열풍이다. 중, 고등학생, 대학생은 물론이요, 직장인 심지어는 유치원생들까지 영어에 빠져 살고 있다. 전 국민이 ‘영어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요즘엔 ‘영어는 다 잘한다’는 말도 있다.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만점에 가까운 어학시험 점수를 받는 대학생들이 무성한데 점수에 걸맞게 말하고 듣고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영어는 다 잘한다는데 말처럼 진짜 잘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 영어를 진짜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어를 너무 잘해서 읽고 듣는 대로 한국말로 뱉어내는 사람들, 바로 국제회의 통역사들이다. ‘외영인과의 인터뷰’ 두 번째 주인공은 바로 ‘영어의 달인’ 국제회의 통역사(영어과 ‘83)이다. 통역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국제회의 통역, 그리고 영어의 모든 것에 대해 들어봤다.(이하 1문 1답)
<국제회의 통역사에 대하여>
Q. 동시통역사의 정확한 명칭은 무엇이고 통역사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신다면?
통역사의 공식 명칭은 국제회의 통역사(International Conference Interpreter)에요. 통역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명칭에 차이가 있는데 연사의 말이 끝나고 뒤따라 통역하는 순차통역, 회의장 뒤편에 있는 부스(booth)에서 2인이 교대로 실시하는 동시통역이 있고, 인원이 적을 때 장비 없이 동시로 통역하는 위스퍼링(whispering) 등이 있습니다. 통역사는 물론 언어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전달해 주는 일을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어를 단어 그대로 옮기는 것은 아니에요. 예를 들어 A언어로 말을 하면 그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그 연상된 이미지를 통역사의 언어능력으로 B언어로 전달하게 되죠.
Q. 국제회의 통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보통 통역사들은 국제회의장 뒤쪽이나 위에 있는 부스(booth)에서 통역을 하게 됩니다. 부스를 ‘닭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두 명이 20분에서 30분간 교대로 회의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헤드폰으로 듣고 마이크를 통해 통역합니다. 한국어-영어를 통역하는 경우 문법상 어순이 다르기 때문에 말 그대로 ‘동시로’ 통역할 때도 있지만, 2-3초정도 듣고 난 후에 통역을 시작해서 따라가게 될 때가 많습니다. 국제회의에서는 연사의 강연을 일방적으로 통역할 뿐 아니라, 질의응답 시간에도 쌍방향으로 통역을 하게 됩니다. 동시로 진행되는 회의장에서 통역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를 이용해서 연사의 입이 되고 청중의 귀가 된다고 할 수 있어요.
Q. 국제회의에서 필요한 통역사의 능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흔희 통역이 그냥 사람의 말만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에요. 특히 동시통역의 경우는 더욱 그렇죠. 연사의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기억하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예측하는 일을 순식간에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해요. 또 연사마다 발음이나 억양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다양한 영어 발음과 액센트에 익숙해지고 들었을 때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Q. 언제부터 통역을 시작하셨고 지금까지 주로 어떤 회의를 통역하셨는지요?
1989
년도에 통역대학원(한국외대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4년 정도 한국통신 전속 통역사로 일했어요. 그 후 잠시 독일에서 살다가 1997년 이후로는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통역을 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제네바 UN본부에서 '고문 방지 협약'에 관한 회의 때 통역을 했고, 최근에는 한미 FTA협상 때 워싱턴에서 통역을 한 적도 있네요. 일반적으로는 IT, 금융, 보험, 품질, 과학, 환경, 학술회의, 의료기기, 치과회의, 바이오,쌀(rice)회의 등등 정말 다양한 내용을 통역합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통역과 가장 힘들었던 통역은?
사실 통역이라는 게 하나같이 모두 힘들어요. 흔히 통역사들끼리는 ‘폭탄 맞는다’고 하는데 방심하고 회의장에 들어갔다가 굉장히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말합니다. 반대로 정말 어려운 주제라 걱정을 하고 가는데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경우도 있고요. 다 어렵지만 그 중에서도 UN본부에 가서 통역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NBA 샤킬 오닐 선수나 잭 웰치(Jack Welch),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같은 유명 인사를 만났던 것도 생각납니다.부산 BEXCO가 생기기 이전 ‘센텀시티 사업’의 통역을 담당해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물론 항상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 때 줄기세포연구로 유명하셨던 교수님의 통역을 여러 번 담당했었는데 나중에 그 분의 연구 결과가 허위로 드러났을 때 정말 기분이 언짢았어요. 통역사는 연사와 어느 정도 공감이나 교감을 하면서 말을 전달하게 되는데 제가 통역한 그분의 말이 다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말 허탈하고 맥이 빠졌습니다.
Q. 프리랜서 통역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프리랜서 통역사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프리랜서 통역사는 보통 소속된 에이전시를 통해 일거리를 얻게 되요. 저는 현재 외대 통번역센터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개인고객이나 통역사끼리의 네트워크를 통해 일을 얻게 됩니다. 프리랜서 통역사의 장점이라면 무엇보다 자유롭다는 거죠. 업무 시간을 선택할 수 있고 때로 자신을 위해 시간투자를 할 수도 있고요.보수도 상근 통역사보다 높습니다. 반면, 자유롭다는 것이 곧 단점이 될 수도 있어요. 자기 관리를 잘못하면 오히려 시간에 쫓기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워낙 다양한 분야를 다루다보니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기는 어렵다는 점, 생각하는 것처럼 항상 고상한 일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 등도 단점이 될 수 있죠. 오늘은 호텔에서 일하지만 내일은 공장에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Q. 교직이나 기업체가 아닌 프리랜서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워낙 활동적인 성격이라 정체되거나 반복되는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교직은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죠.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해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매우 컸습니다. 기업체는 적응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어요. (한국통신에서) 상근통역사로 근무하면서 개인의 발전에 대한 기업의 제약이 크다고 생각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아직도 한국 여성들에게는 사회적인 제약이 심하죠. 그래서 결국 프리랜서 통역사가 된 것 같아요. 지금은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Q.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통역사들의 연봉인데 혹시 공개하실 수 있으신지요?
원칙적으로 연봉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대신 통역요율은 말씀드릴게요. 통역사의 경우 하루 여섯 시간 기준으로 80만원을 받게 되고 여기서 한 시간이 추가될 때마다 15만원을 더 받게 됩니다. 요율은 물가 인상에 따라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이고요.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되겠죠?(웃음)
<국제회의 통역사가 되기까지>
Q. 국제회의 통역사를 두고 흔히 영어의 달인이라 합니다. 선배님께서는 순수 국내파이심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영어실력을 갖추셨는데 영어과 재학시절 어떻게 공부하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말씀하신대로 어릴 적 미국에 가 본적은 없지만 중, 고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정말 좋아했어요. 그 때문에 대학 전공도 영어를 선택했죠. 생각해보면 대학 때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지는 않은데(웃음) 영어와 관련된 활동은 꾸준히 했었죠. 1, 2학년 때는 아거스(The Argus)에서 영자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3, 4학년 때는 통역협회에 소속되어 대외적으로 학생통역사 일을 했어요. 특별한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영어를 접하고 쓰고 말하는 일을 했었죠.
Q. 통역대학원은 진학 자체도 힘들지만 그 안에서 정상적으로 공부를 마치고 졸업하기는 더욱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통역대학원 공부과정과 선배님께서는 대학원시절 어떻게 공부하셨는지 간략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실 제가 통역대학원에 진학했을 때는 지금만큼 여건이 좋지 못했어요. 지금은 학생들이 모두 통역사분들에게 수업을 듣지만 그때는 통역사이신 교수님이 거의 없으셨어요. 게다가 당시만 해도 교수님들께서 통역은 학문이 아니라 스킬이라는 마인드를 갖고 계셔서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주어진 커리큘럼대로 공부를 하면서도 학생들 스스로 노력을 많이 했죠. 지금처럼 순차통역과 국제회의통역이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부담감은 좀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졸업시험에서 합격, 불합격으로 나누어서 아예 졸업을 시키지 않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당시의 걱정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방학에도 매일 학교에 나와서 열 시간 이상씩 그룹 스터디를 한 것은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고요.
<영어의 달인 영어를 말하다>
Q. 영어 열풍입니다. 유치원생부터 시작해서 중고생, 대학생, 직장인까지 모두가 영어에 매달려 사는‘영어공화국’ 한국의 현실에 대해 ‘영어의 달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먼저 영어를 배우는 현상자체는 바람직하다고 봐요. 또 그래야할 필요가 있고요. 영어가 이제는 한 나라의 언어라기보다 국제공통어가 되었기 때문에 원활한 커뮤니케이션과 빠르고 정확한 지식의 습득을 위해 영어를 구사하는 것은 필수라고 볼 수 있죠. 업무 특성상 출장 다닐 기회가 많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보면 북유럽은 물론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도 살아있는 영어를 잘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으로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희망은 대한민국 사람들, 특히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모두 저만큼 영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겠지만 분명 가치 있는 일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그 언어(영어)로 직접 받아들이는 것이 번역을 통해 얻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니까요. 하지만 취직이나, 입학, 승진 등을 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정한 영어 실력과는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죠.
Q. 흔히들 ‘요새 영어는 다 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어학 시험(토익, 토플 등)점수 인플레와 잦아진 해외교류로 부풀어진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웃으며)사실 그런 말은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있었던 얘기예요. 제가 영어를 전공한다고 하니 아는 분들께서 ‘영어는 누구나 하는 건데 차라리 남이 안하는 다른 언어를 택하라’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물론 전체적으로 영어 구사력이 향상된 것은 맞아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어를 잘한다.’의 기준 또한 높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잘하는 사람의 실력과 못하는 사람의 실력이 더 벌어지는 것 같아요. 일종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랄까? 그만큼 갈수록 높아지는 기준으로 ‘영어를 잘하기’는 어렵다는 얘기죠. 영어를 잘 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가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부족하면 영어를 진정 잘 하는 것은 아니죠.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으면 모든 분야에서 수준 이상으로 영어를 구사하기는 어려워요. 저도 항상 공부하는 걸요.
Q. ‘영어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신다면?
먼저 영어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대학교에서 전공으로 공부하고 끝낼게 아니라 계속 공부해야 합니다. 영어실력은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진짜 나만의 재산이자 정체성(identity)의 일부예요. 계속 지키고 키워 나가야죠. 영어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계속 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Input이 많아야 한다는 말이에요.
분야별로 얘기 하자면 말하기의 경우 듣고 따라하는 shadowing을 한다든지 혼자 있을 때 계속 영어로 말해보고 영어로 생각하는 습관을 갖는 게 좋아요. 리스닝을 위해서는 피아노곡 등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영어가 음역차이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여기 적응하는데 안성맞춤이죠. 읽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두 페이지짜리를 사전을 찾아가며 정독하는 경우와 소설처럼 책을 빠르게 읽어나가는 것을 병행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글쓰기가 한국인에게 특히 어려운데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문구나 표현이 있으면 정리해 놓으면 좋습니다. 제 경우는 어릴 때 외국서적의 한글 번역본을 보고 영어로 옮긴 다음에 영어 원본을 보고 비교하는 연습을 하기도 했어요. 호기심을 유지하면서 이것은 영어로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손으로 정리까지 한다면 누구나 곧 달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영어대학 후배들에게>
Q. 미래 국제회의 통역사를 꿈꾸는 영어대학 학생들이 있습니다. 어떤 자질이 필요하고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좋은 통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문을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국문과 영문 모두를 말해요. 영어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국어 실력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극복능력이 뛰어나야 해요. 통역을 하다보면 실수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실수에 너무 구속되지 말고 쉽게 떨쳐버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즉, 심장이 튼튼해야 합니다. 또 프리랜서 통역을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시간관리 능력도 요구되겠지요. 좋은 목소리를 유지하고 불규칙한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건강을 지키는 것도 필수입니다. 통역사가 상상하는 것만큼 화려하고 고상하기만 한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치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겠네요. 도덕성도 정말 중요해요. 업무상 맡은 일에 대해 비밀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영어나 통역은 중독성이 강한 만큼,자신을 고립시킬 수가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평생 취미를 갖는 게 필요해요.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사람을 사귀는 것,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는 것 모두 좋아요.
Q. 앞으로 사회인이 될 영어대학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먼저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한 번씩 찾아오는데 오직 준비된 사람만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준비가 되어있다면 기회가 있을 때 망설이지 말고 도전하세요. 또, 밖으로 보여 지는 것보다 내가 가진 능력을 키우세요. 달리 말해 내공을 쌓으라고 하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미래에 대한 식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변의 작은 일에서 벗어나 큰일에 동참할 수 있고, 변화를 감지해서 거기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취재: 김희중(영어통번역학과 02/vader1022@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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