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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2 | 조회수 : 879

제목 : 레바논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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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레바논 공화국(Lebanese Republic)이다. 북쪽과 동쪽은 시리아, 남쪽은 이스라엘과 접하며 서쪽은 지중해에 닿아 있다. 1958년 대통령 샤문의 친미노선에 따른 헌법 개정으로 촉발된 정부군과 반군의 길고 긴 내전 (1975~1990)으로 정정이 불안해졌다. 또한 1970년 이후 30년이 넘도록 계속된 팔레스타인 및 이슬람교 게릴라들과 이스라엘의 무장투쟁 등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레바논 남부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납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군이 2006년 7월 레바논의 주요 도시들을 폭격하여 불안한 정세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2006년 8월 통과된 유엔결의안 1701조는 헤즈볼라의 무장해제를 권고하였다. 행정구역은 8개 주(mohafazah)로 이루어져 있다.

위치 서아시아 지중해 동쪽
경위도 동경 35° 50", 북위 33° 50"
면적(㎢) 10400
해안선(㎞) 225
시간대 UTC+2
수도 베이루트(Beirut)
종족구성 아랍인 (95%), 아르메니아인 (4%)
공용어 아랍어, 프랑스어, 영어, 아르메니아어
종교 이슬람교 (59.7%), 그리스도교 (39%)
독립일 1943-11-22
국가원수 미셸 술레이만(Michel Sleiman)대통령(2008.5 선출, 임기 6년)
국제전화 +961
정체 공화제
통화 리비아 파운드(Lebanese Pound, L£)
인터넷도메인 .lb
홈페이지 http://www.informs.gov.lb
인구(명) 3,971,941 (2008)
평균수명(세) 73.41 (2008)
출산률(명) 1.87 (2008)
1인당 GDP($) 11,300 (2007)
실업률(%) 20 (2007)
수출 규모(억$) 34.45 (2007)
수입 규모(억$) 107.5 (2007)
인구밀도(명/㎢) 38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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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역사
BC 3,000년 경부터 페니키아인(人)이 오늘날의 레바논 해안지대에 거주하며 티레, 시돈, 바일 등의 많은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다. 교역과 염색업으로 융성했던 이들은 주변 강대국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로마 등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시대에는 그리스도교가 널리 수용되었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와 이슬람교도인 아랍인에게 정복당하자 아랍화,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북부에는 그리스트인(마로나이트파), 남부에는 이슬람인(드루즈파)이 가주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이르는 관문이라는 이유로 셀주크 투르크와 십자군의 전쟁터가 되었으며, 1516년 오스만 투르크의 레바논공국이 되었다. 1860년 드루즈파가 마로나이트파 1만 명을 학살하는 종교 갈등을 경험하였지만 봉합되었고, 영국과 프랑스군이 1918년 오스만터키를 패배시킨 후 시리아에 편입된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1926년 독립운동이 결실을 이루어 시리아에서 분리·독립, 위임통치에서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1943년 정계 및 종교지도자 간 국민협약(National Pact, 불문(不文)협약)이 채택되어 독립 후의 정부 각 종파 간 권력 배분 합의가 타결되면서 1944년 1월 독립하였다.

독립 후 친서구적(親西歐的)이며 보수적인 그리스도교도와 아랍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급진적 이슬람교도 두 세력의 대립 위에 정부가 세워짐으로써 정치는 안정을 잃었다. 1948년 5월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참전하고 전쟁 결과 15만 여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유입되어 베이루트 주변에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그후 미국의 군사·경제원조를 받아들이고자 한 일이 이슬람교도들의 반발을 다시 불러일으켰고, 1958년 5월 샤문이 헌법을 개정하고 재선을 꾀하자 대규모적인 내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샤문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파병을 요청, 미해병대가 상륙하였고, 샤문이 사임함으로써 내전은 끝났으나 정치적 혼란은 그대로 잠복하였다.

1969년 레바논·PLO간 카이로 협정체결에서 PLO의 남부레바논 (Arqub지역)으로부터의 이스라엘 공격이 허용되고 PLO의 레바논 국내문제 개입 배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후 요르단에 있던 PLO는 ‘검은 9월’사건 이후 1970년 베이루트로 본부가 옮겨왔으며, 레바논 국내 팔레스타인 난민이 30만 명으로 증가, 레바논 남부는 사실상 정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국가 속의 국가’가 되았다. PLO가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자 이스라엘도 레바논 팔레스타인 기지에 대한 보복 공격을 가해 레바논의 국론은 기독교계의 기지 분쇄와 회교계의 기지 지지로 양분되었고 마침내 내전으로 다시 격화되었다.

레바논 정부는 PLO를 탄압하게 되었고 그 결과 다른 아랍 여러 나라, 특히 강경파인 시리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1973년 4월 정부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있었으며, 같은 해 일어난 제4차 중동전을 통하여 PLO가 국제적 지위를 확립한 가운데 1975년 그리스도교 우파가 팔레스타인인(人)이 탄 버스에 테러를 가함으로써 레바논 전역이 내전에 빠졌다. 이후 사분오열된 그리스도교 및 이슬람교의 각파들은 각기 무장 민병대(民兵隊)를 내세워 정부군·PLO·이스라엘 등과 끊임없이 충돌하였으며 곳곳에서 수많은 테러가 계속되었다.

이스라엘군이 빈번하게 레바논을 침공하여 점령과 철수를 거듭했고, 각 정파 간의 정전협정은 그때마다 이해를 달리하는 반대파에 의해 무산되었으며, 시리아를 주축으로 하는 아랍평화군(ADF)도 테러로 인하여 주둔과 철수를 거듭하면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특히 1982년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격은 PLO를 튀니지로 축출하였으나 베이루트를 비롯한 레바논 전역이 거의 황폐화되었다. 또 군소정당이 난립, 정정이 매우 불안한 가운데 1982년과 1989년 국회가 선출한 대통령이 선출 직후 테러로 폭사하는 등 극한 사태로 치달았다.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던 레바논 사태는 정부군에 맞서 저항을 계속해 온 그리스도교 민병대의 장군 미셸이 1990년 정부군의 대규모 포격에 항복, 망명함으로써 극적인 전기를 맞았다. 이와 함께 아운이 지휘한 1만 5000명의 민병대가 항복하고 15년 이상 내전에 참여해온 각 무장단체들이 베이루트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했으며, 그리스도교 마론파와 이슬람교 수니파 등 민병조직의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거국내각이 1990년 12월 출범함으로써 내전을 종식시키고 재건을 모색하였다. 2005년 5월 이스라엘군이 레바논에서 철군하자 레바논 각 정파들은 시리아의 철군도 요청하였다. 2004년 10월 시리아군의 철군에 대한 유엔의 결의가 있었으며 2005년 베이루트에서의 대규모 시위 결과 마침내 2005년 시리아군도 철군하였다. UN 권고안 1701에 따라 이제 헤브볼라의 무장해제가 남아있다.

레바논인들의 조상인 페니키아인(人)들이 인류 문화에 공헌한 최대의 업적은 서구 문자의 기원이 된 알파벳의 고안이다. 해상 무역의 발달로 상거래를 기록할 필요가 있었던 페니키아인들은 복잡하고 난해한 쐐기 문자 대신 간편한 22개의 알파벳을 만들어내었다. 서기전 13세기 경 만들어진 페니키아 알파벳은 빈번한 교역관계에 있던 그리스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변형되었다. 이는 결국 로마식 알파벳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오늘날 대부분 유럽언어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레바논은 역사적으로 주변의 피압박 종파 및 소수민족의 피난처가 되어 각 피난집단은 오랜 세기동안 정치적·사회적·종교적으로 상호 분리·고립되어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하였다. 이에 국가 수립 시 다수 종파의 이해를 반영하고 공존을 보장해 줄 종파별 안배주의(Confessionalism)가 채택되었으며, 지배가문이 이를 이용하여 종교와 혈연, 지배 가문에의 충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생활관습은 종파 간 종교 관습을 제외하고는 유사하지만 기독교 계통은 개방적 성향을, 회교 및 드루즈 계통은 보수적 성향을 비교적 띄며, 아랍권 국가 중에서는 종교 및 언론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되어 있다.


문화
레바논의 예술은 활기찬 편인데, 답케(dabke)는 열정적인 민속무용이며 유명한 벨리춤도 결혼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학에서는 19세기 시인이자 작가이며 예술가인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휴일은 종교에 관련되며, 레바논에는 많은 종파가 있기 때문에 축하행사도 많다.
정치
레바논은 1943년 11월 22일 독립을 선언하고 1944년 프랑스로부터 통치권을 인수받았다. 1943년 결정된 국민협약(National Pact, 불문(不文)협약)은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 국회의원을 각 종파 간 배분하도록 규정하였다. 1926년 5월 23일 공포된 헌법에 의하면 행정권은 대통령, 입법권은 단원제 의회인 국민의회가 장악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1970~1980년대 지속된 내전과 전쟁 등으로 국민의회의 의원선거조차 불가능해지면서 정치공백과 생활수준 저하, 소유권의 무정부상태에 직면했다. 레바논 사태 해결을 위한 아랍위원회가 정치개혁안을 마련해 1989년 10월 레바논 의회의 정식승인을 받았다. 합의개혁안은 ① 국회의석을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동수배분 ② 군·정부의 그리스도교 독점개선 ③ 대통령 권한축소, 내각권한 강화 등이다.

1990년 헌법 개정(1926년 제정,1943년 개정)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대폭 약화되고 총리에게 강한 권한이 주어지는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부각되었다. 이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 총리는 이슬람교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교 시아파, 국방장관은 이슬람교 드루즈파, 군사령관은 마론파 출신 중에서 선출되나 다른 정부 및 군부 요직의 종파별 안배는 폐지되었다.

단임제의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며 임기는 6년이고, 총리는 대통령이 국회의장과 협의 후 임명한다. 국회는 임기 4년의 의원 128명으로 구성된다. 1998년 11월 에밀 라후드(Emile Lahoud)가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5년 6월 총선거에서 정당별 의석 분포는 미래운동블록 36석, 민주진영 15석, 발전과 저항블록 15석, 자유애국운동 15석, 저항애국당 14석, Qornet Shewan 6석, 레바논세력 5석, 대중브록 4석, 트이폴리독립블록 3석, 카태브개혁운동 2석, 시리아민족사회당 2석, 타크낙당 2석, 바스당 1석, 민주좌파 1석, 민주회복운동 1석, 카태즈당 1석, 나세리대중운동 1석, 독립당 4석 등이다. 총리는 2005년 6월 30일 이후 후아드 시니오라이다.

법원은 대법원, 특별법원, 헌법재판소, 지방법원으로 구성된다. 레바논의 외교는 중동전에 참전하지 않는 온건아랍주의를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하며, 팔랑헤당은 친서방, 이슬람은 반미 친러시아, 특히 이란 추종 등 외교도 다양하다. 시리아와는 전통적으로 긴밀한 관계로 여러 협정을 체결하였고 최근 관계가 한층 긴밀해졌다. 레바논은 1991년 내전종식에 따라 옛 지위를 회복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2001년 당시 병력은 6만 4600명이었다. 국방비는 GDP의 3.1% (2005년 추산)이다. 1978년 이후 남레바논의 일부를 점령하여 왔던 이스라엘군이 2000년 5월에, 아랍평화유지군(ADF)으로서 약 3만 5000명의 시리아군이 2005년 철수하였다.
경제
레바논의 1인당 국민소득은 5,900달러이며, 산업별 GDP 구성비율은 농업 7%, 공업 21%, 서비스업 72% (2005년)으로 2006년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2.8% (2006년 추산) 이다. 비옥한 토양과 온화한 기후에서 재배되는 다양한 야채와 과일은 농업과 식품 공업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2006년 상반기 기준 식품 생산의 50% 이상이 EU 등 해외로 수출되어 레바논 식품 산업이 전체 제조업의 26%를 차지하고 있다. 보석 가공공업은 2000년 대 이후 새로운 산업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2006년 보석 산업에는 5,000개의 공장 및 업소와 1만 명의 근로자가 종사한다.

레바논의 아름다운 자연, 제이타 동굴(Jeita Grotto) 등 풍부한 유적지, 각종 국제대회와 쇼핑 페스티벌(Live Lebanon, Dazzling Lebanon) 개최 등의 정부 정책이 관광객을 꾸준히 유인하여, 한때 레바논 GDP의 12%를 차지하였던 관광업이 레바논의 주요 수입원으로 한 몫을 하고 있다. 전체 관광객 수의 80~85%까지 차지하는 아랍 관광객유치가 관건이다. 이는 아랍어가 통하고, 쇼핑 및 유흥 시설이 잘 갖추어진 것에 기인힌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2005년 시리아 군대가 레바논에서 철수함에 따라 레바논 정세 안정에 대한 기대심리, 원유가 상승, 해외거주 레바논 동포 및 911사태에 따른 아랍 부호들의 부동산 투자 등으로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바논 경제는 독과점 체제가 유지되어 경쟁과 효과적인 투자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리아와의 각종 경제협정을 체결, 양국간 인적·물적 교류의 자유화를 통한 경제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으나, 자유화의 폭은 시리아 시장의 개방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교포 자금 유입과 전화, 전기, 도로 복구사업 등 사회간접시설 재건에 힘쓰는 일은 재건계획의 추진 및 해외교포의 레바논의 정치적 장래에 대한 신뢰감 증대에 달려있다.

2006년 정부 재정 수입은 44.5억 달러, 지출은 74.3억 달러, 적자는 20억 달러이다. 누적되는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하여 낙후된 세제 개혁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세수증대를 위해 세무관리직원수도 늘렸다. 수출은 18억 8000만 달러, 수입은 93억 40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식품, 화학섬유, 보석, 전자제품, 섬유제품, 금속제품, 수입품은 전자제품, 자동차, 광물자원, 의류 등이고 주요 수출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프랑스, 미국, 시리아, 쿠웨이트, 요르단, 수입국은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독일, 스위스, 영국 등이다. 높은 실업률(2006년 추산 20%), 재정 및 무역적자의 심화, 빈부격차(20% 최빈민층이 총개인소득의 4%만을 차지)가 큰 사회문제이다.

2002년 1월 브뤼셀에서 EU와 파트너십 협약을 체결, 25개의 농작물을 제외한 모든 수출품의 관세를 면제 받는 대신 유럽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점진적으로 철폐하기로 하였다. 이 협약이 큰 도움은 되지 않지만 장래 EU의 진정한 동반자로 발돋움하고 국내 공업 부문을 업그레이드 하는데 필요하다. 또한 WTO 회원 가입을 신청하였으며 1999년 4월 옵서버 자격을 얻었고 2007년말까지 WTO 가입을 목표로 USAID(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와 MOU를 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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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의 관계

레바논과 한국은 1969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통상대표부를 설치하였다. 1981년 2월 남북한이 동시에 외교관계를 수립했는데, 우파 그리스도교 세력이 남한에 호의적이고, 좌파 이슬람교도 세력은 북한에 호의적이어서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펴고 있다. 한국의 건설업체는 1978년의 내전 때 모두 철수하였다. 한편, 한국의 입장에서는 레바논이 아랍권에 대한 각종 정보수집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1970년대 전반까지 중동지역 금융시장과 대(對)아랍권 상품수출 중계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이에 한국은 2004년 특별 무상협력사업으로 레바논 8개 정부부처를, 2005년 레바논 6개 기관에 총 98,000달러를 지원하였다. 초청 등 인적 교류 사업 지원도 하고 있다. 2000년 기준 대(對)한국 수출 430만 달러, 수입 9115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구리·알루미늄 쓰레기, 재생용 고무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전기·전자제품, 섬유류, 플라스틱, 고무제품, 타이어 등이다. 2001년 기준 한국인 교민은 15명, 체류자는 20명이다. 2006년에는 한국-레바논 무역협정을 체결하여 상호 증진을 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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