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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2 | 조회수 : 534

제목 : 리비아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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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대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국(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이다. 동쪽으로 이집트, 수단, 서쪽으로 튀니지, 알제리, 남쪽으로 차드, 니제르와 국경을 접하고 북쪽으로는 지중해에 면한다. 2006년 국가원수에 알바그다드 알리 알마흐무디(al-Baghdadi Ali al-Mahmudi)가 취임했지만, 카다피(1969년 쿠데타로 집권 시작)가 여전히 최고 지도자로 있다. 테러국가로 지목되어 서방국가들로부터 경제 제재를 받아왔는데 1999년 이후 아프리카 각국의 내전 중재자로 활동하는 등 태도를 바꾸고 서방국가들과도 관계를 개선하였다. 행정구역은 25개 자치시(baladiyah)로 이루어져 있다.



위치 북아프리카 중앙부, 지중해 연안
경위도 동경 17° 00", 북위 25° 00"
면적(㎢) 1759540
해안선(㎞) 1770
시간대 UTC+2
수도 트리폴리
종족구성 베르베르인 및 아랍인 (97%)
공용어 아랍어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 (97%)
독립일 1951-12-24
국가원수 카다피(Muammar Abu Minyar al Qadhafi) (69.9 취임)
국제전화 +218
정체 사회주의 인민공화제
통화 디나르(Dinar, D)
인터넷도메인 .ly
홈페이지 http://gpco.gov.ly
인구(명) 6,173,579 (2008)
평균수명(세) 77.07 (2008)
출산률(명) 3.15 (2008)
1인당 GDP($) 12,300 (2007)
실업률(%) 30 (2005)
수출 규모(억$) 404.7 (2007)
수입 규모(억$) 144.7 (2007)
인구밀도(명/㎢) 4 (2008)

 

 

 

 

 

역사.문화

역사
리비아에는 오래 전부터 유목민 베르베르인(人)이 살았으나 지중해 연안부는 기원전에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 그리스인, 로마인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641∼642년 아랍인의 서진세력(西進勢力)에 정복된 뒤부터 이슬람 문화권이 되었으며 16세기에는 오스만투르크 세력이 이 지역에 뻗쳐 19세기까지 통치하였다.

1911년 이탈리아와 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이탈리아군(軍)이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에 상륙했으며, 뒤이어 투르크가 발칸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돌입하자 이탈리아는 1912년부터 두 지역을 하나의 식민지로 만들고 리비아라고 불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이탈리아에 대한 민중의 저항운동이 거세게 지속되었으나 파시스트의 압정이 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격전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구(舊)이탈리아 식민지 처리 문제에 대하여 미국·영국·프랑스 및 소련 사이에 이견(異見)이 있었으나 UN의 권고에 따라 1951년 12월 트리폴리타니아, 키레나이카, 페잔 등 3개 지방의 연방제에 의한 리비아 연합왕국으로 독립하였다. 1969년 국왕 부재중에 M.A.카다피가 이끄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리비아는 카다피의 쿠데타 이후 혁명평의회(革命評議會)가 3권을 장악하고 그 의장인 카다피가 국가원수가 되어 군최고사령관을 겸하여왔다. 1977년 통치기구를 개편하여 최고결정기관으로서 국회에 해당하는 전인민회의(General People’s Congress)를 설치하고, 그 안에 전인민회의 서기국이 설치되었다. 서기국은 혁명평의회를 대신하는 것으로 카다피는 초대 서기장이 되었다가 1979년 3월에 사임하였으나, 여전히 국가원수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1986년 1월 미국은 미국내 리비아 자산동결, 무역거래금지 및 리비아 내 미국인 완전 철수 등을 내용으로 하는 리비아 경제제재조치를 발표하였으며, 1986년 4월 트리폴리에 있는 카다피 지도자숙소 및 벵가지의 주요시설을 폭격하였다. 미국과 영국이 1988년 12월 영국에서 발생한 팬암기 폭파범으로 지목된 리비아인(人) 2명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고, 1992년 3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안보리가 항공기 운항 금지, 무기 금수 등을 결의하였다. 이후 1993년 11월 해외자산 동결, 원유관련장비 금수 등 추가제재를 결의하였다.

 

 

 

 

 

정치

 

리비아는 사회주의와 카다피 특유의 이슬람 이론을 혼합한 ‘그린북(Green Book)’ 사상에 의거하여, 헌법이 없으며 인민대중국(Jamahiriya) 체제가 코란과 함께 리비아의 정치사회질서를 규율하고 있다. 카다피에 의하여 정립되고 제도화된 이 체제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가장한 전제적 독재체제이며 단일정당인 아랍사회주의자동맹(Arab Socialist Union) 또한 근대적 독재 통치기구라고 비난받고 있다. 리비아의 모든 인민은 지역단위의 기초인민회의(Basic People’s Congress)에 참여하여 지방자치 조직을 대표하는 서기국을 선임하고, 기초인민회의 대표들은 총리 및 각료는 임명하는 전인민회의(3,000명)의 일원이 된다. 1977년 인민대중국 체제 성립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중앙·지방조직 개편이 있었고, 특히 공공행정 기능을 담당하는 전인민위원회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빈번하고 대폭적인 통폐합·부활과정을 거쳤다. 오늘날의 행정조직은 1994년 1월에 결정되었다. 최고사법결정권을 가지는 대법원은 코란의 율법을 따른다.

카다피는 현재 정부조직의 어떠한 공식적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이른바 ‘혁명의 지도자'(1990년 3월 전인민회의에 추대) 및 군최고사령관으로서 사실상 최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전인민회의는 그의 결정을 추인하는 ‘고무도장’(rubber stamp)에 불과하다. 카다피의 주요 권력행사 수단은 혁명위원회(revolutionary committee)로 카다피는 이를 통하여 국정 전반과 각 기관을 통제하고 있다.

서방세계에 대한 카다피의 도전에 대하여 미국은 1986년 1월 미국 내 리비아 자산동결, 무역거래금지 및 리비아 내 미국인 완전 철수 등을 내용으로 하는 리비아 경제제재조치를 발표하였으며, 1986년 4월 트리폴리에 있는 카다피 지도자 숙소 및 벵가지의 주요시설을 폭격하였다. 미국과 영국이 1988년 12월 영국에서 발생한 팬암기 폭파범으로 지목된 리비아인(人) 2명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고, 1992년 3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안보리가 항공기 운항 금지, 무기 금수 등을 결의하였다. 이후 1993년 11월 해외자산 동결, 원유관련장비 금수 등 추가제재를 결의하였다.

카다피는 1993년 경제고립 등 난국 타개를 위해서 자국 순례자들의 이스라엘 방문을 허용하고 리비아계 유대인을 초청하였다. 1999년 4월에는 팬암기 폭파 혐의범 2명을 인도함에 따라 UN 제재조치가 정지되었다. 이후 영국과의 외교관계도 회복되었으며, EU(European Union:유럽연합) 국가들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1999년 9월 1일 집권 30주년을 맞은 카다피는 아프리카 각국의 내전에 대해 중재자로 활동하였으며 1999년 7월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아프리카 통일기구) 특별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아프리카연합 창설과 단일통화 채택 문제 등을 제기하였다. 이후 2000년 10월 아프리카연합 법안 비준서를 OAU 사무국에 기탁하는 등 아프리카연합 창설에 적극 기여하고 있다. 국방비는 GDP의 3.9% (2005년 추산)이며, 총병력은 6만 5000명(1999년)이다.

 

 

 

경제

 

산업별 GDP 구성 비율은 농업 2.1%, 제조업 81.7%, 서비스업 16.2% (2007년 추산)이다. 전체 노동력의 산업별 구성 비율은 농업 17%, 제조업 23%, 서비스업 59% (2004년)으로 본래 농업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안지대의 서부를 중심으로 보리, 감자, 대추야자 등 식량작물과 올리브, 감귤류, 아몬드 및 땅콩, 토마토 등이 재배되고, 양, 염소, 낙타 등이 사육되어 땅콩, 피혁, 양털 등을 수출하였다. 그러나 수출량은 극히 적고 식량도 자급이 어렵다. 전국토의 1.7%만 경작이 가능하고 경작면적의 5% 정도만 용수 공급을 할 수 있다.

리비아는 1959년에 유전이 발견된 이래 석유산출국이 되어 경제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2001년 11월 현재 일일 생산량은 172만 배럴(세계 17위), 원유 매장량은 391억 3천만 배럴(세계 9위, 2006년)이며, 원유 생산이 국내총생산의 30%, 총수출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OPEC(석유수출국기구), OAPEC(아랍석유수출국기구)의 주요 구성국이며, 수출액의 대부분을 원유 및 석유제품·석유가스가 차지하여 경제적으로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석유는 시드라만(灣)에 면한 시르테 분지를 중심으로 산출되며, 잘탄·아말·인티사르 및 다라·사리르 유전 등이 중요하고, 서부 국경지역의 구다미스, 남서부의 무르주크, 남동부의 쿠프라 등지에도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천연가스 생산량은 108.4억㎥(세계 39위), 매장량은 1조 4300억㎥(세계 23위)이다. 대수로사업 등 대규모공사와 고도기술을 요구하는 건설공사는 외국회사가 수행하여 왔으나, 최근 들어 자국화정책을 적극 추진중이다. 실업률이 30%( 2004년), 절대빈곤층의 비율이 7.4% (2005년)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정부의 경제정책의 기조는 석유수입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공업화를 비롯한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데 있으며, 사회주의 경제체제와 시장경제체제를 혼합 운용하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원유, 천영가스, 석유제품이며, 수입품은 기계류, 자동차, 수송장비, 전기기기, 식품, 소비재 등이다. 주요 수출국의 비중은 이탈리아 36.7%, 독일 14.3%, 에스파냐 8.7%, 미국 6.1%, 프랑스 5.6%, 터키 5.3% 이며 수입국의 비중은 이탈리아 18.9%, 독일 7.9%, 중국 7.5%, 튀니지 6.3%, 프랑스 5.8%, 터키 5.2%, 미국 4.7%, 한국 4.3%, 영국 4%(2006년 기준)이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리비아는 한국과 1978년 5월 영사관계를 맺고 1980년 12월 29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북한과는 1974년 1월부터 수교하여 대사관을 개설하였다. 우리나라와 1977년 의료협력협정, 1990년 문화협력·무역협정·경제기술협정에 가서명하였고 1999년 경제과학기술협정과 문화협정에 서명하였다. 한국-리비아간 양국 관계는 지난 20여년간 실질 경제 협력 성과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오고 있으며, 최근 우리나라의 국제무대 진출 관련 지지 및 고위 인사 교류 확대, 문화 교류 협력 등 제반 분야에서 협력이 확대·강화되고 있다. 특히 1970년대 말부터 건설 분야를 중심으로 발전된 양국의 실질협력관계는 UN 제재하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꾸준히 확대되어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상호신뢰를 쌓았다. UN의 대리비아 제재 중에도 우리나라는 공관 규모를 축소하거나 철수하지 않음은 물론 리비아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이 성실히 공사를 이행하였다.

1997년 외무차관 아메르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2005년 1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리비아를 방문, 그간 경제 통상 분야에 주로 국한되었던 양국관계가 정치, 문화 등 전방위 협력관계로 확대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2006년 9월 한명숙 총리가 리비아를 방문, 양국 관계가 한층 더 공고해졌다. 주요 수입품은 가전제품·기계·자동차·타이어 등이며, 수출품은 어류 알루미늄 원자재이다. 2001년 기준 한국인 체류자는 1,05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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