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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2 | 조회수 : 1188

제목 : 사우디아라비아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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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사우디아라비아왕국(Kingdom of Saudi Arabia)이다. 사우디란 '사우드가()', '사우드왕조(王朝)'라는 뜻이다. 북쪽으로 요르단· 이라크, 동쪽으로 페르시아만() 연안의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남쪽으로 오만, 예멘에 접하고, 서쪽으로 홍해를 사이에 두고 이집트, 수단, 에리트레아와 마주한다. 이슬람교의 발상지로 이슬람교 최대의 성지인 메카가 있다. 세계 최대 산유국이다. 1994년에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뒤부터 쿠웨이트와의 합병이 추진되고 있다. 행정구역은 13개주(mintaqah)로 이루어져 있다.

 

 

 

위치 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경위도 동경 45° 00", 북위 25° 00"

면적() 1960582

해안선() 2640

시간대 UTC+3

수도 리야드(Riyadh)

종족구성 아랍인 (90%), 아프리카계 아시아인 (10%)

공용어 아랍어

종교 이슬람교 (100%)

독립일 1932923

국가원수 압둘라(Abdullah) 국왕(05.8.1 즉위)

국제전화 +966

정체 세습군주제

통화 사우디 리얄(Riyal)

인터넷도메인 .sa

홈페이지 http://www.saudinf.com/

인구() 28,161,417 (2008)

평균수명() 76.09 (2008)

출산률() 3.89 (2008)

1인당 GDP($) 23,200 (2007)

실업률(%) 13 (2007)

수출 규모($) 2,300 (2007)

수입 규모($) 811.7 (2007)

인구밀도(/) 14 (2008)

 

 

역사

통일 사우디아라비아국이 건국된 것은 1927년이다. 그 이전에는 사막의 여러 오아시스에서 많은 부족이 산재하여 종교적으로는 하나를 이루었지만 통일된 왕국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들 부족들은 홍해 연안의 헤자즈 지방(중심은 메카)과 중앙 고지로부터 페르시아만(아라비아만)에 걸쳐있는 네지드 지방(중심은 리야드)을 중심으로 양분되고 서로 다투었다. 양대 세력은 리야드 출신의 압둘 아지즈(ABD AL-AZIZ bin Abd al-Rahman AL SAUD, Ibn Saud)(통칭 이븐 사우드)에 의하여 통일되어 근대입헌군주국를 건국, 19329월에 현재의 왕국명으로 바꾸었다. 국왕의 공식 명칭은 이슬람 두 신성모스크 수호자이다. 압둘 아지즈왕은 1953년에 사망하고 장남 이븐 사우드가 뒤를 이었다. 1950년대에는 중동의 여러 나라들이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민족주의를 앞세운 정치적 격동기를 맞이함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는 외교는 물론 국내 정책에서 보수와 혁신이 대립, 방황하게 되었다.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압둘 아지즈가 죽은 뒤 사우드와 파이잘로 대표되는 보수·혁신 양파의 대립은 심각한 양상을 빚었으며 외교적·경제적 측면에서 시대적 요구에 따르지 못한 사우드왕은 1964년 왕족회의의 결정으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은 파이잘왕 (ABDALLAH bin Abd al-Aziz)은 왕정 유지와 석유산업 개발의 친미정책을 기반으로 온건·진보적 보수주의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파이잘왕은 특히 이집트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을 기울였으나1967년 북예멘의 내란과 남예멘의 독립운동을 둘러싸고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러나 19673월 제3차 중동전쟁(中東戰爭)에서 패배한 이집트가 북예멘 파견군을 철수시키고 수에즈운하 폐쇄로 인한 손해액의 상당 부분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의 원조로 보전되자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는 크게 호전되었다. 197310월의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집트·시리아와 함께 참전하고, 석유 전략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파이잘왕은 보수주의의 리더로서 아랍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753월 조카에게 암살되고, 왕족회의에서는 할리드 황태자가 새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19826월 할리드왕이 죽고 황태자인 제1부총리 파드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페르시아만안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GCC) 의 의장국으로 중동지역의 평화와 결속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시 사우디아라비아는 쿠웨이트의 왕족과 피난민을 받아들이고 이라크군 격퇴를 위해 다국적군과 아랍군 주둔을 허용하였다. 외국 군대의 주둔은 왕가와 대중의 마찰을 초래하여 사회 변동을 가져왔다. 미군은 2003년 철수하였지만 그해 테러리스트와 이슬람원리주의자에 대한 비난을 퍼부우며 친서방노선을 견지하게 되었다.

 

 

문화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라비아반도의 4/5를 차지하는 회교 군주국(정교 일체)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왕국으로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있으며 계율이 엄한 와하비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나라이다. 전 세계 이슬람교도들이 꿈속에서마저 동경하는 성지 메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이다. 거리의 중앙에 솟은 성스러운 모스크와 카아바 신전은 지극히 성스러운 곳으로 이슬람 신앙 최고의 성역이다. 평생 단 한번의 순례를 위해 온세계에서 많은 신도가 모여든다. 모든 축제나 휴일은 이슬람교와 관계된 것들이며 그중 가장 큰 것은 한 달간 해뜬 후부터 해질 때까지 단식을 행하는 라마단이다.

 

정치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체제는 군주제로서 정교혼합정체(政敎混合政體)이다. 국왕은 왕인 동시에 종교상의 수장이며 와하비즘을 건국의 기초이념으로 하고 있다. 국왕의 권한은 입법·사법·행정 등 각 방면에 걸쳐서 절대적이지만 무제한은 아니며, 이슬람법과 관습법에 따르도록 의무화되어 있다. 이슬람법은 울라마라고 불리는 이슬람교 장로들에 의해 해석·운용된다. 파드 국왕이 서거한 후 200581일에 즉위한 압둘라(ABDALLAH bin Abd al-Aziz Al Saud)가 국왕(6) 겸 수상이다.

 

성문헌법은 존재하지 않고 정당도 인정되지 않지만 1992년의 왕령으로 정부 부처의 권한과 의무가 명시된 법령이 반포되었다. 각료는 행정적으로 국왕을 보필하고, 입법면에서는 자문기구가 법안을 제출하여 국왕이 재가하면 칙령이 된다. 4년 임기의 150명 의원으로 구성되는 자문기구는 의회 성격이 강하지만 왕에 의하여 임명된다. 왕과 왕족회의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특히 황태자의 발언권이 강하다. 왕족 내의 신구세력의 갈등, 신흥 중산계급의 등장, 이란·시리아·리비아 등 아랍 급진 세력의 선동 등이 정치적 과제로 남아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는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가 엄격한 이슬람교 교리의 지배를 받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이지만, 걸프전쟁으로 인해 국내 이슬람교 정통주의 세력과 테크노크라트 간 반목이 심화되는 양상이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다. 2003년 각료회의는 지방의회를 구성하고 의원수의 반을 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도록 하는 계획을 공표하였다.

 

1994년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침공을 받고 주변국가들에 의해서 포위되자,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간 합병이 추진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대외정책 목표는 왕정의 유지와 석유 자원의 보호, 이슬람교문화의 수호이다. 걸프전쟁 이전에는 외교정책이 온건 친서방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비동맹 중립을 표방하여 모든 국가의 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 외세 배격의 원칙을 유지해왔지만 걸프전쟁 이후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과의 협력과 자체안보를 강화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군대는 지원제이며, 1979년 이후 18~23세의 전국민 대상으로 한 징병제를 추진키로 하였으나 산업인력 및 행정력 부족에 대한 반대 여론으로 지연되고 있다. 총병력은 정규군 227,000(육군 75000, 공군 20000, 해군 12000), 방위군 77000, 경찰 2만 명, 국경해안 경비대 15000, 특수군 8000명이다. 2005년 현재 국방비 예산는 안보 분야 포함 254억 달러이다. 국방비는 GDP10%(2005년 추산)로 오만, 카타르 다음으로 세계 제 3위이다.

 

경제

1인당 GDP13,800달러, 산업별 인구 구성은 농업 3%, 제조업 63.6%, 서비스업33.4% (2006년 추산)이다. 농업은 불리한 자연조건 때문에 저조한 편이지만 중동 여러 국가에 비해 양호하다. 농업생산물은 밀, 보리, 토마토, 맬론, 감귤, 양고기 닭, 계란, 우유 등이다. 전체 식료품 수요의 약 70%를 수입에 의존한다. 공업의 비중이 높으며, 1970년 대 중반 석유개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유전은 페르시아만 연안에 몰려 있으며, 다란이 중심지이다. 원유의 추정매장량은 2642억 배럴로 세계 제1위이며(2006년 추산) 25.2%를 차지한다. 천연가스는 6.568로 세계 4위이며(2006년 추산) 4%가 매장되어 있다. 그밖에 보크사이트·구리··철광석 등도 많다. 라스타누라의 정유소에서 절제된 원유는 그 적출항 및 사막횡단 지중해 연안(레바논의 시돈항) 연결파이프라인을 이용하여 수출된다. 석유 개발은 미국계의 아람코석유(캘리포니아 스탠더드, 엑슨, 텍사코, 소코니바큠의 4대 회사가 공동 출자)가 독점하여왔으나, 1977년 국유화 시책에 합의하였다.

 

쿠웨이트와의 중립지대에는 미국계의 게티석유, 중립지대 앞바다의 해저유전 개발에는 일본의 아라비아 석유가 진출해 있다. 산유량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급상승하였으며, 오늘날 세계 원유 생산의 반을 차지하고, 1일생산량은 947만 배럴(2005)에 달하여 세계 최대의 석유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내부 대립을 원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선진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경제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가 인상에 따른 비산유국들의 충격을 최소한 억제하고 OPEC의 단일유가 책정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며, 1983년 석유가격 인하 경쟁으로 해체 위기에 직면한 OPEC를 결속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사우디아라비아는 막대한 석유수입을 바탕으로 IMF의 약 30%를 담당하고 있으며 아랍 경제사회개발기금, 역내의 각종 금융기구 등을 통하여 자금을 지원해주고 있다. UN 산하 주요기관, 아프리카개발은행(African Development Bank:AFDB), 인근 비산유국을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 아시아 국가에 이르기까지 대외지원을 강화해나가고 있다.

 

대내적으로 수자원(水資源)의 획득과 사막의 녹화(綠化), 수리사업 등을 착실히 진행시키고 있는 모범국이다. 1981년 페르시아만에서 홍해까지 아라비아 횡단 송유관을 건설하여 북미지역과 유럽 등지에 대한 수출로를 크게 단축시켰으며, 198811월 석유산업의 전면적 재편성과 새로운 국영석유회사 설립을 결정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요 석유시장은 미국·프랑스·네덜란드·일본 등이며, 이들 나라는 공산품과 농산품의 주요 수입원이 된다. 2006년 수출은 204.5억달러, 수입은 64.16억달러이다. 따라서 주요 수입품목은 식품, 전자제품, 화학제품, 섬유류, 기계, 자동차, 원자재 공산품, 식료품 등이며, 수출 품목은 원유, 석유제품, 건축자재, 농산물석유화학제품 및 원유 등이다. 또한 전력은 전적으로 석유에 의해 발전되고 있다. 수출대상국은 일본 17.6%, 미국 15.7%, 대한민국 9.6%, 중국 7.2%, 싱가포르4.4% 등이며, 수입대상국은 미국 12.2%, 독일 8.6%, 중국 7.9%, 일본7.3%, 영국 4.8%, 이탈리아 4.8% (2006) 등이다. 실업율은 13%이며 , 물가상승율 1.9%(2006)이다. 공공부채는 32.5%(2006)이다. .

 

우리나라와의 관계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19621016일에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737월에는 주()사우디아라비아 상주 대사관이 개설되고 19754월에는 서울에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이 설치되었다. 한국은 원유의 안정적인 공급이 필요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기술인력 부족과 사회간접자본 미비가 경제개발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 되어, 양국은 정치·경제·문화의 각 분야에 걸쳐 선린외교정책이 강화되었다. 한국은 원유 수입과 동시에 기획전문가·의료단·어업기술자 등을 파견하여 기술 협력을 제공하였으며, 사회간접자본 개발에 일익을 담당, 도로·항만 등의 건설계약 실적이 1978년까지 100억 달러를 상회하여, 한때 한국 총건설 수출의 80% 이상이라는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후 건설공사 수주(受注)가 대형화되면서 시멘트공장, 담수화(淡水化)공장, 석유화학공장 등의 플랜트 건설 등 건설공사 유형이 기술 집약적으로 고도화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발전소 건설 및 전화사업(電化事業) 참여 등 양국간의 경제·통상 관계는 더욱 긴밀하였다. 양국은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19751월에는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경제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양국의 협력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연례(年例) 합동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합의, 여러차례 회의가 개최되었다. 1980년 대통령 최규하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제 협력, 통상 증대, 원유의 안정 공급 루트 확보 및 홍보외교 강화 등 경제· 외교 부문의 협력관계를 굳게 다져, ()사우디아라비아 진출을 가속화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교육교류약정, 투자보장협정(1997), -사우디 투자보장협정(2002), -사우디 이중과세 방지협정, -사우디 고등교육 협력약정, -사우디 IT 협력 (2007)을 체결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98년 압둘라 왕세자가 관계 장관 여러 명과 함께 방한하였으며, 2000년 석유광물자원장관 나이미, 상무장관 파키, 2부총리 겸 국방항공장관 술탄이 방한하였다. 한국에서는 1998년 산업자원부장관 박태영, 1999년 산업자원부장관 정덕구, 2001년 정보통신부장관 양승철, 국무총리 이한동, 2004년 반기문 외교부장관, 2005년 이해찬 국무총리 등이 방문하였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방문하였다. 2006년 대() 한국 수출액은 205.5억 달러이고, 수입액은 29.7억달러이다. 주요 수출상품은 원유, 석유화학 제품 등이며, 수입품은 직물, 섬유제품, 전기·전자제품, 타이어, 자동차, 철강제품, 화학제품, 기타 생활용품 등이다. 2009월 한국 교민 및 체류자는 1,462명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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