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20079197

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619

제목 : 시리아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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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시리아 아랍공화국(al-Jumhuriyah al-Arabiyah as-Suriyah)이며, 영어로는 'Syrian Arab Republic'이다. 서쪽으로 레바논, 남서쪽으로 이스라엘, 남쪽으로 요르단, 동쪽으로 이라크, 북쪽으로는 터키와 국경을 면한다.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가로지르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걸쳐있다. 대표적인 아랍 국가인 레바논과 함께 아랍 부흥운동의 발상지로서 19세기 말부터 아랍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어왔고, 오늘날까지 아랍 통일의 사상 및 운동의 중심지이다. 행정구역은 14개 주(muhafazah)로 되어 있다.

 

위치 지중해 동부

경위도 동경 38° 00", 북위 35° 00"

면적 185180

해안선 193

시간대 UTC+2

수도 다마스쿠스

종족구성 아랍인 (90.3%), 쿠르드족, 아르메니아인

공용어 아랍어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 (74%), 기타 이슬람교 종파(16%), 그리스도교 (10%)

건국일 1946년 04월 17일

국가원수/국무총리 바샤르(Bashar Al-Assad) 대통령 (2000.7취임,임기7년)

국제전화 +963

정체 사회주의 공화제

통화 시리아 파운드(Syrian pound, LS)

인터넷도메인 .sy

홈페이지 http://www.parliament.gov.sy

 

 

 

역사

시리아는 레바논과 함께 오늘날 아랍 부흥운동의 발상지이다. 근대에 들어와 투르크 제국 치하에서 정치적 자립을 지향하는 아랍어(문화) 부활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역설적으로 이 운동을 제창한 것은 그리스도교도였으며 지원한 것은 이슬람교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아랍의 독립을 꾀하는 반(反)터키, 대(對)영국 협력의 군사활동인 ‘아랍의 반란’이 있었으며, 그후 메카의 샤리프 후사인이 다마스쿠스에서 통일 ‘아랍 왕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1920년4월). 그러나 서구 열강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랍 독립의 갈망을 무시하고 몇 가지 세력권으로 분단하거나 위임통치령이라는 명목의 식민지로 만들어나갔다. 시리아는 1920년 7월부터 프랑스의 지배에 들어갔다. 이것이 오히려 아랍 통합 사상을 강화하고, 반식민지·반제국주의가 독립운동의 표어가 되었다.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것으로 저항이 두절되는 일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시리아는 프랑스 괴뢰정권 비시정부군에 가담한 식민지 당국군과 자유프랑스·영국 연합군과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지만 1941년 9월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대전이 끝난 후에도 양국군의 점령은 계속되었나 UN의 일원으로서 독립이 인정되었으며 마침내 1946년 4월에 양국군이 철수하고 완전 독립이 실현되었다.

시리아는 오랫동안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프랑스의 위임통치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제도는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독립 후 10여 년 동안 전근대적인 호족(豪族)이면서 부유층이기도 한 민족주의자들과 친(親)서구적이며 귀족적인 정치 지도자들이 결성한 집단에 의한 정권이 계속되었다. 그들은 국민통합 이외는 정치이념이 결여되어 정부의 무능, 정치가의 독직(瀆職)과 권력남용을 가져오고 이에 실망한 중산계급·도시민들이 차츰 정치강령과 조직원칙을 가진 정치결사(政治結社)의 출현을 바라게 되었다. 이에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 정당이 생겨났지만, 1949년 여름부터 소장(少壯)군인에 의한 쿠데타가 빈발하여 국가질서를 어지럽혔다.

 

극우 종교단체나 공산당과 같은 국제적 조직을 가진 정당 이외에 반공·대(大)시리아주의의 시리아 국민당,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인민당, 아랍의 통일과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아랍 부흥사회당(바트당) 등이 등장하였는데, 이들 정당은 모두 이스라엘을 적으로 보고 이를 지원하는 미국 등을 증오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그다드조약(중동조약기구)이 성립한 1955년부터 국내외 정국은 크게 긴장하였으며, 마침내 1958년 이집트와의 합병에 의한 ‘아랍 연합공화국’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를 추진했던 바트당은 오히려 활동의 자유를 상실하였으며 1961년에 ‘아랍 사회주의’ 체제에의 지향이 선언되자 인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시리아는 ‘연합’에서 이탈하였다. 그 후 1963년에 바트당이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재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국내의 사회개혁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던 중 당 내부에 대립이 생겨 1966년 좌파가 실력으로 정권을 잡았다. 1967년 이스라엘-아랍전쟁 시에는 골란고원을 점령당하여 오늘에 이른다.

 

1970년에는 우파인 하피즈 알 아사드가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며, 대통령 아사드 통치 아래 2차례의 선거를 치르며 집권당인 바트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국내정국은 지금까지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1973년 새 헌법을 제정하였고, 1984년 3인의 부통령제를 창설하였다. 1999년 2월의 총선에서 아사드가 4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2000년 6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7월에 아사드의 차남 바샤르 알 아사드(Bashar al-Asad)가 국민투표에 의하여 정권을 이어받았다. 1976년 이후 표면상 평화유지 목적으로 레바논에 주둔한 시리아 군대가 2005년 4월 철수하였다.

 

 

 

문화

시리아는 도덕적·윤리적 가치를 가족, 종교, 교육, 자기수양 등에 두고 있다. 살아 있는 민속전통의 나라로 다양한 종류의 칼춤인 알사바흐와 다브케스에서 시리아의 문화를 느낄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나 결혼식장에서 민속의상을 볼 수 있으며 다마스쿠스의 알레포와 다른 시리아의 도시에서도 감귤나무, 포도나무, 꽃으로 장식된 생활 지역을 볼 수 있다. 중세에는 다마스쿠스의 칼 제조업이 중동과 중앙아시아, 남부유럽까지 유명하였다. 시리아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전통품인 자수는 점차 패션화되고 있으며, 가운과 재킷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수세기 동안 풍부한 점토를 이용하여 도자기 공업이 발달하였고, 도자기 산업은 음식을 저장하는 용기를 생산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자'라고 알려진 항아리는 올리브 기름이나 물을 길러두기 위해 만들어졌다.

 

스포츠 활동은 국내외적으로 활동적이며, 1976년 범아랍대회와 1992년 지중해대회를 개최하였다. 농구와 축구 리그가 벌어지며 도시대항의 경기가 시리아 전역에서 펼쳐진다. 대부분의 주요한 도시에는 국제규모의 스포츠종합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밖에 수영·테니스·탁구 등도 즐기며 보디빌딩과 헬스 등도 일부계층에서 선호되고 낙타경주도 인기 있다.

 

중동 최대의 우마야드 모스크, 함마디 재래시장, 사도바울 관련 낙마교회 등으로 유명한 구 다마스커스, 제노비아 여왕 시 전성기를 누린 팔미라(Palmyra, 아랍어명 Tadmur), 다마스커스 북서쪽 200㎞ 십자군 시대 성채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기사의 성채(Crac des Chevaliers), 15,000석의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이 있는 보스라, 지중해 해변에 자리잡은 휴양 도시 라타키아 등은 주요 관광지이다.

 

 

 

정치

1973년 3월 13일 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시리아는 대통령 중심의 민주공화국이다. 무제한 재선이 가능한 7년 임기의 대통령은 국민에 의하여 선출되며 2명의 부통령과 수상, 각료 등을 임명한다. 2007년 5월 27일 바샤르 알 아사드 (Bashar al-ASAD)가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의회는 단원제로서 정원은 250명, 임기는 4년이다. 2003년 9월 10일 무하마드 나지 알 우트리가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2007년 4월 총선에서 국민진보전선(NPF)은 172석을, 독립당은 78석을 얻었다.

 

법률 체계는 프랑스와 오스만 법체계가 가미되었으며 민법은 이슬람율법에 의거한다. 사법부는 대통령이 장인 대법원, 대통령에 의하여 임명되는 4년 임기의 법관으로 구성되는 헌법재판소, 폐기법정, 탄원법정, 지방법정, 이혼 보안 경제 등의 특별법정이 있다.

 

재선된 아사드 대통령은 바트당 인사가 아닌 전문 관료를 내각으로 기용하여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시리아는 미국의 경제제재, 유엔안보리에서의 결의안 1559호 채택에 따라 사회주의 노선을 완화, 서방 세계에 대한 우호증진을 강화하고 있다.

 

 

 

경제

2006년 기준 1인당 GDP는 4,100달러이며, 산업별 GDP 구성 비율은 농업 24%, 공업 18%, 서비스업 58%(2005년)로 농업부분의 비중이 높으며 인구의 26% 가량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근대공업 부문도 낙후되어 있다. 프랑스의 식민정책으로 공업 개발이 억제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수입난, 물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섬유, 식품가공, 피혁, 시멘트 등 제조업 분야가 상당히 발전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후 기계류 등을 수입하여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였지만 자원과 기술의 부족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밀, 목화를 중심으로 한 농작물생산과 목축업이 발달하였고, 광물자원으로는 최근에 석유자원과 인광석 등이 지속적인 증산을 보여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유 부존량이 24억 배럴(2006년 추산)로 1일 생산량 405,000 배럴, 1일 소비량 230,000배럴, 수출량이 175,000배럴이다. 천연가스도 85억㎥이지만 수출은 하지않고 전량 국내에서 소비된다. 최근 직물공업, 식품가공업 등의 경공업이 균형 있게 발달하고 중화학공업 분야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무역은 2006년 기준 수출 69.3억달러, 수입 66.4억 달러로서 흑자를 내고 있다.

 

1991년 민간 경제요소 도입과 외자 유치·촉진을 목적으로 한 신투자법이 공포된 후 이자율의 완화, 민간은행 설립 등 자유화가 진행되어 상당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2006년 경제성장률은 4%, 물가상승률은 8%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경제 통제, 낮은 저축과 투자, 높은 실업율(12.5%, 2005년), 물 부족에서 야기되는 국내총생산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농업생산의 불안정성, 금융·환율 제도의 미정비, 수질 오염, 재정지출에서 차지하고 있는 과도한 군사비 등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다.

 

대외부채가 많았으나 상당히 줄어들어 2006년에는 85억 달러에 이르렀으며 외환보유가 55억 달러이다. 시리아 경제의 2대 중심지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이다. 다마스쿠스는 베이루트(레바논)를 외항(外港)으로 하는 무역과 공업의 요지이며, 알레포는 북동부의 대농업지대와 유일한 항구인 라타키아를 잇는 상업과 금융의 거점이다.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중간지대가 예부터의 농촌지대이며, 수십 년 동안 개발되어온 북동부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시리아는 한국과 1963년 3월에 시리아의 새 정부를 승인한 이래 외교관계 수립에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양국간에 특별한 외교관계가 없다. 그러나 북한은 시리아의 좌경화정책에 따라 1966년 7월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특히 제3차 중동전을 계기로 북한과 시리아는 밀접한 사이가 되었다. 또 한국의 대(對)이스라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시리아는 UN에서 공산측 결의안의 공동 제안국이 되거나 표결에서 공산측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973년 12월 한국의 친(親)아랍 성명과 대통령 아사드의 경제 자유화정책에 따른 문호개방으로 한국과 시리아의 관계는 차차 호전되고 있으며, 1974년에는 한국 민간사절단이 시리아를 방문하였고, 1977년 5월에는 시리아에서 개최된 아랍 20개국 상공회의연합회의에 한국의 민간통상사절단 파견 등 경제교류가 서서히 증진되고 있다. 2000년 이후에는 통신관련 장관들이 상호방문하였으며, 2003년 대(對) 한국 수입은 3억 달러이고, 수출은 2,215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전자제품, 섬유류 등이고, 수출품은 광물성연료, 가죽, 식품 등이다. 한국 교민는 14명이며 삼성전자(삼성전자 지분 49%)가 합작투자 회사를 수립하여 전자교환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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