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20080948

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690

제목 : 아프가니스탄 글쓴이 : 중동연구소
첨부파일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국가일반개항

정식 명칭은 아프가니스탄공화국(Republic of Afghanistan)이다. 파미르 고원의 남서쪽에 있으며, 국토 대부분이 해발고도 1000m를 넘는 고원에 위치한다. 동쪽과 남쪽으로 파키스탄, 서쪽으로 이란, 북쪽으로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으로는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에 접한다. 2001년 미국대폭발테러사건 후 오사마 빈 라덴의 양도 요구를 거부하자 미국, 영국 및 반군(反軍)인 북부동맹에 의해 공격받았다. 행정구역은 34개주(velayat)로 되어 있다.

 

 

 

위치 서남아시아

경위도 동경 65° 00", 북위 33° 00"

면적 647500

시간대 UTC+4.5

수도 카불(Kabul)

종족구성 파슈툰족 (42%), 타지크족 (27%), 하자라족(9%), 우즈베크족 (9%)

공용어 파슈토어, 다리어, 터키어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 (80%), 시아파 이슬람교 (19%)

건국일 1919년 8월 19일

국가원수/국무총리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 대통령(04.12.7 당선, 임기 5년)

국제전화 +93

정체 공화제

통화 아프가니(Afghanis, Af)

인터넷도메인 .af

홈페이지 http://www.president.gov.af/

 

 

역사

아프가니스탄은 파미르고원의 연장선 상에 있는 고원지대를 끼고 있어, 북부는 아무다리야강이 흘러내려 중앙아시아와 접하고 동부는 카이바르고개로 인더스강(江) 유역에 이르며 서남부는 헤라트에서 이란과 연결되기 때문에 오랫동안 동서문화 교류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인간 거주의 역사가 길다.

 

인간 거주의 최초 흔적은 북부에 있는 발흐 부근의 무스티에식(式) 석기(石器)이다. 최고(最古)의 정착 유적은 남부의 칸다하르 부근에 있는 문디가크이며, 이 시기 중기(中期)에는 인도 하라파 문화와의 교류가 있어 상류층에서는 철기도 사용하였다. 발흐의 철기시대 유적은 아나우 유적 제4층의 문화와 비슷하며, BC 1000년기(期)에 이 지방 일대에 살고 있던 이란 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敎)가 발흐를 중심으로 하여 널리 이란에 퍼져나갔던 것은 기원전 6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 지방은 그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하에 들어갔지만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란에서부터 헤라트·칸다하르·발흐를 정복하였다. 그의 사후(死後)에는 부하 장군인 셀레우코스가 이 지방을 통치하였으나 BC 322년에 북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타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아프가니스탄의 동부는 인도에 편입되었다.

 

기원전 250년 경 박트리아의 디오도투스는 그리스계의 독립왕국을 만들고, 같은 무렵에 출현한 파르티아 왕국과 남서부의 세이스탄 및 아리아 지방을 두고 다투었으나 패배하였다. 박트리아 왕국은 BC 175년에 인도 펀자브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그 결과 불교가 아프가니스탄에 유포되었다. 북쪽의 대월지[大月氏], 서쪽의 파르티아와 사카족(族)에 둘러싸여 차츰 압박을 받게 되었다. 한편 기원전 1세기에는 쿠샨 왕조의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카불의 그리스계 왕조를 타도하고 카니슈카 왕 때 간다라를 중심으로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걸친 대왕국을 건설하였으며 이 지방의 그리스문화가 불교문화와 결합하여 유명한 간다라 미술을 낳았다.

 

기원 후3∼4세기에 쿠샨 왕조는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인도의 굽타 왕조 앞에서 힘을 잃었으며 5세기에는 에프탈의 침입을 받았다. 그 결과 6세기의 이 지방은 쿠샨·에프탈 등의 왕조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642년 아랍의 확대에 따라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였고 67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호라산 지방도 아랍의 지배하에 들어가 이 지방의 주민은 결국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820년에 호라산 태수(大守)로 임명된 아바스 왕조의 장군 타히르가 타히르 왕조를 세웠는데, 그 후 867년의 이란계 사파르 왕조, 874년의 사만 왕조, 962년의 가즈나 왕조, 1187년의 구르 왕조, 1215년의 흐와리즘샤 왕조로 이어져 나가다가 21년에 몽골의 침입을 당하였다. 몽골의 지배는 1397년 티무르의 침입으로 끝나고, 티무르의 자손은 헤라트를 수도로 삼고 이란 문화를 보호하였다. 1526년에 티무르의 자손 바부르는 델리의 왕위에 올라 무굴 왕조를 이룩하였으나, 그후 약 200년간 아프가니스탄은 이란의 사파비 왕조와 무굴 왕조로 분할 영유되었다. 아프간족의 마흐무트는 1722년 이란에 침입하여 사파비 왕조를 타도하였으나, 1737년에 투르크계의 나디르샤가 이란에서 아프간족을 몰아내었으며 이어 칸다하르와 카불을 점령하고 델리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나디르샤는 1747년에 암살되었으며 그의 부하인 두라니족(아프간족 주요 족의 하나)의 지도자 아흐마드 한 아브달리가 그 해에 칸다하르에서 왕위에 오르고 아흐마드샤 두라니라 칭하였다. 이것이 아프간 민족국가 건국의 시초이다. 아흐마드 샤 다음에는 그의 아들 티무르 샤가 즉위하고 카불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가 죽은 뒤 왕위 다툼이 일어났으며 결국 바라크자이족의 도스트 무하마드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1838년에 정식으로 카불의 아미르(왕)라고 칭했으며, 이에 구왕국(舊王國)시대의 바라크자이 왕조가 성립되었다.

 

19세기부터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 제정러시아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인도 방위 측면에서 제정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자국의 세력하에 두려고 하였으며, 도스트 무하마드와 그의 아들 시르알리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제1차(1838∼1842), 제2차(1878∼1880) 아프간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일부가 인도에 할양되었으며, 1893년 아브도르 라흐만 칸 때 인도와의 국경선이 확정되고 1901년에는 연금을 받기로 하고 외교권을 인도에 일임하게 되었다. 1905년 하비브알라가 이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또한 1907년에는 제정러시아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우위를 인정하였다.

 

하비브알라는 내정면에서는 하비비아 학교의 기초를 다지고 페르시아어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적 자각의 향상을 촉진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중립을 엄수하였다. 1919년 하비브알라가 반(反)영국주의자의 손에 암살된 후 같은 해 후계자가 된 아만알라는 반영국적 의견에 동감하여 인도 정부에 대해 적대행위를 취했으나(제3차 아프간전쟁)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8월에 라왈핀디 화평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으로 인도 정부로부터의 연금이 폐지되고 외교지도권 폐지가 약정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왕은 국내 통일과 서양문화 도입에 힘썼으나 보수세력의 반대로 퇴위한 뒤 망명하였다. 뒤를 이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연 나디르한마져 1933년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자히르 샤가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후 오랫동안 왕위를 유지하였으나,1973년 7월 국왕의 외유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前) 총리가 실권을 쥐고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1978년 4월에는 공산세력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타라키(Taraki) 정권이 수립되었고, 1979년 9월에는 궁정쿠데타로 아민(Amin) 정권이 수립되었다. 같은해 12월 기존 정권 수호라는 명분 아래 구소련군이 침공하였고 구소련의 군사 개입 아래 카르말 정권이 성립되었다. 뒤이어 구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여러 반군 단체들이 게릴라전을 개시하였으며, 1989년 2월 10만여 명의 구소련군이 제네바 합의에 근거하여 철수하였다. 철수를 완료함으로써 친소정권인 모하마드 나지불라 정권이 약화된 가운데, 각 지역의 무자헤딘 반군세력은 대대적 군사공격을 개시하여 1992년 4월 25일 마침내 수도 카불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1978년부터 14년간 동안 계속된 장기간의 내전은 무자헤딘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슬람 집권평의회 의장 S.모자데디는 5월 내각을 발족시키고, 6월 B.랍바니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12월 랍바니는 임기 2년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파벌로 구성된 무자헤딘 세력은 신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주도권 다툼을 벌이며 대규모 무력충돌을 벌였다. 구(舊)정부군 중 해산하지 않은 일부와 마수드파(派)는 랍바니 정부를 지지하였으나 헤크마티아르파·도스탐파 등은 정부를 비판하며 별도의 무장세력을 유지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하였다. 1996년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최고지도자 모하메드 오마르:Mohammed Omar)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였고 정부를 해산한 후 회교국가를 수립하였다. 전 국토의 90%까지 점령한 탈레반은 이후에도 북쪽지방에 주둔한 소수파 중심의 반(反)탈레반 연합세력과 내전을 지속하였다. 그러던 중 2001년 9월 11일 미국대폭발테러사건이 일어났고, 미국은 그 주범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은신중인 오사마 빈 라덴(Usama Bin Laden)을 지목하였다. 미국은 탈레반에게 오사마 빈 라덴을 양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0월 7일부터 영국과 함께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반군(反軍)인 북부동맹도 공격을 강화하여 2001년 11월 수도인 카불을 점령하고 탈레반 정권은 무너졌다.

 

UN은 2001년 본(Bonn) 회의에서 신헌법 제정, 2004년 대통령 선거, 2005년 국회의원 선거를 합의하여 실행에 옮겼다. 2004년 12월 7일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가 최초의 민주적 선거에 의한 대통령이 되고, 2005년 12월 19일 국회가 개원되었다.

 

 

문화

동서교통, 즉 서남아시아와 동부 및 동남아시아와의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 유적이 많으며 바미안 지역의 세계최대 마애석불인 바미안 석불이 유명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안석굴은 3~5세기 경 카불 북서쪽 바미안 계곡의 해발 2590m 암벽에 만들어진 동굴사원군(群)으로 종교 유적의 차원을 넘어 인류 공동의 문화재이다.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를 신앙하는 탈레반이 국제사회의 간곡한 만류 요청에도 불구하고 석불의 일부를 파괴하여 국제 사회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탈레반은 바미안 지역의 몽골리안 하자르족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이를 파괴한 것으로 본다.

 

불교 유적 보존과 복원을 위하여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적게는 수천 많게는 수만 개의 불교 유적이 산재한다. 인도가 불교의 발상지였고 파키스탄이 간다라 미술의 발상지였다는 점을 상기할 때 아프가니스탄은 불교의 중흥지이면서 대승불교의 출발점으로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키는 지역이다. 석불 이외에 조각·상아제품·유리단지·청동 입상·화폐·세밀화 등이 있다.

 

 

정치

2004년 1월 16일 채택된 헌법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의 정체는 이슬람 공화국이다. 대통령이 국가원수이며 행정수반이다. 임기 5년의 대통령과 2명의 부통령은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며 2004년 10월 9일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가 55.4%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국회의 승인을 얻어 25개 행정 부처의 장을 임명한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 의회 결정비준권, 장관·판사·장교 임명동의권, 비상사태 선포권 등을 가진다. 내각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장관들로 구성되며 대내외 정책을 집행하고 경제발전계획을 추진한다. 지방행정은 주(州)·군·시·읍으로 나누어지고, 각 행정기관의 장은 지역평의회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3년이다.

 

양단원제의 하원에 해당되는 국회(Wolesi Jirga)는 국민의 선거에 의한 임기 5년 249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며, 상원에 해당되는 원로회의(Meshrano Jirga)는 102명의 의원(임기 4년의 34석은 주선거에서, 임기 3년의 34석은 지방선거에서 선출되며 임기 5년의 나머지 34석은 대통령이 지명)으로 구성된다. 의회는 2/3 이상 출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법안을 제출·수정·폐지할 수 있다. 양원의 의견이 어긋나는 경우 합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정한다.

 

족장회의에서 유래된 로야지르가(Loya Jirgah)는 독립, 국민 주권, 영토 통합, 헌법 개정, 대통령 탄핵 등을 의결하며 국회의원, 주 및 지방 정부장으로 구성된다. 외교면을 보면, UN에서는 반(反)탈레반파가 아프가니스탄을 대표하며 의석을 유지하고 있다. 탈레반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있는 국가는 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케냐 등이며, 여타 국제사회는 탄자니아 미국대사관 폭발사건 이후 그 주모자로 추정되는 오사마 빈 라덴을 탈레반이 비호한다는 이유로 1999년 10월 경제제재를 부과하는 안보리 결의를 채택하였다. 또, 이슬람국가들도 탈레반이 체첸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경제

1인당 GDP는 800달러 (2004년 추산)이며 경제성장율은 8%(2006년)이다. GDP의 산업별 구성 비율은 농업 38%, 제조업 24%, 서비스업 38%이다. 노동력의 산업별 구성 비율은 농업 80%, 제조업10%, 서비스업 10% (2004년)이다.

 

농업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인구가 80%나 되며 국민총생산에 대한 기여율도 농업부문이 53% 이상를 차지한다. 국토의 대부분이 중앙아시아 내륙 산악지대에 걸쳐 있기 때문에 경작가능지는 총면적의 약 12%(840만ha)에 지나지 않는다. 농업개발계획 중에서도 러시아 원조에 의한 잘랄라바드 관개운하(750km)와 미국 원조에 의한 헬만드 계곡 개발사업 등이 중시되어 관개 농지의 비율이 높다. 주요 농산물은 밀이며 그 재배지는 전체 농경지의 2/3를 차지한다. 그 밖에도 옥수수·보리·쌀 등의 곡물과 목화·사탕무·사탕수수·과일·채소 등을 재배한다. 목화·과일 등은 매우 중요한 수출품이다. 양 이외에도 소·염소·나귀·낙타·말이 사육되며 최근에 개량종 누에를 수입하여 양잠도 이루어진다.

 

1956년경부터 정부는 동서 양진영의 원조로 종합적인 국토개발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며, 저개발성의 탈피에 주력하였다. 천연자원으로는 예로부터 북부의 바다흐샨 지방에서 나는 라피스라줄리(靑金石)가 유명하지만 제1차 5개년계획(1956∼60)에서의 조사 결과 철·석유 등이 포함된 자원의 존재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개발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으며 석탄·소금·크롬·대리석 등이 약간 개발되어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공업 부문은 대부분 가내공업이며 면직물·모직물·식품·설탕 공업 등이 이루어진다. 소규모직물류, 비누, 가구, 신발류, 비료, 시멘트, 수공예 카펫, 천연가스, 석탄, 구리 긍이 생산된다.

 

제1차 5개년 계획 이후로 바다흐샨 지방의 풀리쿰리 및 카불 부근의 굴바하르에 근대적 방적공장이 건설되었고 풀리쿰리 및 카불 부근 자발우스세라지에 시멘트 공장이, 바다흐샨 지방 바글란에 정당공장(精糖工場)이 각각 건설되었으며, 그 밖에도 비료공장·통조림공장 및 자동차수리 공장 등이 건설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원조로 1만kW 출력의 수력발전소가 잘랄라바드에 건설되었다. 본격적인 개발계획의 실시는 1956∼60년의 제1차 5개년계획부터였는데 도로·발전 등 산업기반의 정비에 중점을 두었고, 총투자액 123억 아프가니 중 약 30%가 외국원조 및 차관으로 충당되었다. 제2차 계획은 1962년부터 총투자액 335억 아프가니, 국민소득 성장률 8∼9%를 목표로 실시되었으며 공업·운수통신·기술자 양성이 중시되었다. 1966년 5월 정부는 경제기구의 개혁과 함께 교육·농업에 중점을 둔 제3차 계획 초안을 발표하였으며, 1976년부터는 장기경제계획으로서 7개년계획이 실시되었다.

 

무역은 만성적 입초(入超)가 계속되고 있으며 적자가 누적되고 있다. 수출은 2차산품이 많아 면·카라쿨·양모·건과(乾果)·융단 등이 주종을 이루며, 수입은 개발계획의 추진상 필요한 자본재가 많다. 무역 상대국은 수출입 모두 러시아가 수위를 차지한다. 2005년 수출 규모는 4억7천1백만 달러이고, 수입 규모는 38억 7,000만 달러이다. 수출대상국의 비중은 인도22%, 파키스탄 21%, 미국 14.6%, 영국 6.3%, 덴마크 5.5%, 핀란드 4.3% (2006)이다. 주요 수출품목은 양귀비류 아편, 과일 견과류, 수제 카펫, 모피, 양모, 면화, 보석류 등이다. 수입대상국은 파키스탄 37.5%, 미국 11.9%, 독일 7.1%, 인도 5.1% (2006년) 등으로 수입품목은 자본재, 식품, 섬유류, 화학제품 등이다. 대외 채무가 80억 달러에 이르며 대부분 러시아 채무이다. 아프가니스탄은 5억 달러를 Multilateral Development Banks (2004) 에 빚지고 있으며 실업율 40% (2005년) 극빈층이 53% (2003년)에 이른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우리나라와는 1973년 12월 수교했으나 1978년 9월 좌경정권의 수립에 따라 단교(斷交)했었다. 그러나 2002년 1월 외교장관간 공동서명에 의한 양국관계가 재개되었다. 2002년 9월 주아프가니스탄 상주대사관, 2003년 12월 주한국아프가니스탄 상주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문화협정(1972년 11월 22일), 경제 및 기술협정(1977년 12월 26일) 등이 체결되고, 1978~1998년 간 270만불의 무상원조, 1995년 난민구호사업에 20만불 지원, 1998년 지진 시 5만불 지원 등이 있었다. 2002년 이후에는 우리나라의 유무상 원조 계획에 따라 직업훈련원, 공무원훈련원, 국립병원, IT 센터, 소수력발전소 등이 건립 중이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의 외무장관, 노동장관, 여성국무장관 등이, 2003년 노동사회장관, 2004년 정보통신부 장관 등이 방한하였으며, 한국은 2003년 한국국제협력단 총재가 방문하였다. 우리나라는 2001년 3월 탈레반 정권의 불상 파괴 관련 유엔총회 및 안보리 의장, 사무총장 및 유네스코 사무총장 앞으로 항의 긴급 메시지를 발송한 바 있다. 2005년 기준 대한수입 9700만 달러, 대한수출 10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담배·섬유류·의류·가전제품 등, 수출품은 감초, 철광-비합금반제품 등이다. 2007년 한국기독교의 선교 활동으로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