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20082077

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716

제목 : 알제리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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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알제리 민주인민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Algeria)이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수단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북동쪽으로 튀니지, 동쪽으로 리비아, 남동쪽으로 니제르, 남서쪽으로 말리·모리타니, 서쪽으로 모로코와 각각 국경을 접하고 북쪽으로는 지중해에 접한다. 헌법에서 이슬람·아랍·베르베르 국가로 정의하고 있다. '알제리'는 '섬들'이라는 뜻을 가진 수도(首都) 알제(Algiers, 아랍어로 al-jaz'ir)에서 유래했다. 행정구역은 48개주(wilaya)로 되어 있다

 

 

원어명 Algérie

위치 북부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경위도 동경 3° 00", 북위 28° 00"

면적 2381740

해안선 998

시간대 UTC+1

수도 알제

종족구성 아랍-베르베르인 (99%), 유럽인 (1% 이하)

공용어 아랍어, 베르베르어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 (99%)

건국일 1962년 07월 05일

국가원수/국무총리 부테플리카(Abdel Aziz Bouteflika)대통령(09.4.9 삼선 임기5년)

국제전화 +213

정체 인민공화제

통화 알제리 디나르(Algeria Dinar, DA)

인터넷도메인 .dz

홈페이지 www.el-mouradia.dz

 

역사

선사시대부터 베르베르족(族)이 살았으며, 아틀라스산맥의 북쪽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남부의 타실리나제르고원에는 당시의 생활모습을 그린 동굴화가 남아 있는데, 그림을 통하여 흑인계 주민이 농경과 목축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2세기에는 페니키아인의 무역기지로 번창하였고, 기원전 2세기에는 로마에 정복당하였다.

 

그러나 7세기에 우마이야드족이 지배하기 시작하자 이에 저항한 베르베르족이 남하하였으며, 아틀라스산맥의 남쪽에도 거주자가 생겼다. 그후 11세기경에 아랍 진출의 제2파와 알모라비데왕조(무라비트왕조)의 흥성 등으로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크게 진척되고 사하라를 경유한 나이저강 유역과의 교역이 활발해졌다. 1515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알제에 총독부를 두고 세습적인 총독 데이(Dey)를 임명한 후부터 이 지역은 모로코와 별도의 역사를 엮어나가게 되었다.

 

17세기에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이 지역은 투르크의 형식적인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독립국에 가까운 정치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서유럽 여러 나라가 서아프리카의 기니만(灣) 연안에 무역기지를 만들어 해상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사하라사막을 횡단하는 육상교역이 쇠퇴하였다.

 

중계무역지였던 이 지역은 타격을 받았고, 해적이 지중해 서부의 선박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해적을 토벌하려는 열강과의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며, 1830년에는 프랑스가 해적기지 제압을 이유로 이 지역에 원정군을 상륙시키고 데이를 격파, 알제를 점령하였다. 이것이 프랑스에 의한 알제리의 식민지 지배의 시초였다. 그러나 그후에도 에미르 아브델 카데르(Emir Abdel-Kader)를 지도자로 하는 저항이 있었으며, 1837년에는 오랑 지방에 대한 카데르의 세력을 인정하는 등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화는 곤란을 겪었다.

 

1871년에는 카비리아 지방의 반(反)프랑스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아틀라스산맥의 북쪽은 거의 프랑스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사하라에서의 반프랑스 항쟁은 계속되었다.

 

1920년대 중엽부터 메살리 하디(Messali Hadi) 등을 중심으로 알제리의 근대적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적 계급투쟁과 결부되어 탄생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슬람교도의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이집트와 터키의 지원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은 1945년 알제리에서 개최된 대(對)독일 승전 축하행사 때 프랑스 국기 대신 민족운동기를 게양하여 프랑스군(軍)으로부터 가혹한 무력진압을 당하였다.

 

1954년 11월 4일 민족해방전선(FLN)으로 뭉친 민족주의운동은 알제리 각지에서 일제히 무력해방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때부터 피비린내 나는 8년간의 투쟁 끝에 1962년 독립을 쟁취하였고, 그해 9월 민주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150여 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63년 아흐메드 벤벨라(Ahmed Ben Bella)가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범(汎)아프리카 운동,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반식민지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화려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1965년 후아리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의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부메디엔은 국회를 해산하고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간부를 중심으로 '혁명평의회'를 설치, 그 의장이라는 형식으로 1967년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6년 국가헌장과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채택되었으며, FLN을 유일한 정당으로 지명했다. 그 해 12월에는 새 헌법하의 직접선거로 부메디엔이 당선되어 1978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의 정권은 사회주의적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아랍연맹과 아프리카 통일기구 안에서도 혁신파·과격파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에스파냐령 서(西)사하라의 비식민지화 문제를 두고 1975년경부터 모로코·모리타니와 대립하게 되었으며, 그 해 말에는 알제리가 지지하는 독립안을 양국이 거부하였다. 그러나 독립을 지향하는 폴리사리오 해방전선은 알제리의 지원하에 모로코와 모리타니에 대하여 게릴라전을 시작하였고, 1976년 2월에는 알지에에서 '살라위 아랍 민주공화국'이라는 국명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알제리와 모로코, 모리타니는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석유수출국기구)의 일원으로서도 과격파의 노선을 걸었다. 1977년 11월 이집트의 대통령 무하마드 A. 사다트(Muhammad A. Sadat)가 중동평화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방문하자 이집트·이스라엘 간의 화평교섭에 강력히 반대하고, 화평교섭을 배반행위로 보는 '거부전선(拒否戰線) 그룹'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1978년 12월 FLN의 특별대회에서 부메디엔의 후계자로 벤제디드 샤들리(Bendjedid Chadli)가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979년 2월의 선거에서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메디엔 체제는 중앙집권적인데다 대통령 개인의 권력이 강력하였으나, 샤들리는 집단지도체제에 의한 정책결정을 기본방침으로 하였으며, 외교노선도 유연성 있게 취하였다. 1974년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와 외교를 재개하였으며, 구소련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1979년 6월에는 투옥되어 있던 초대대통령 벤벨라를 석방하였다. 그리고 1989년 2원 23일 정당구성을 허용하는 새로운 헌법을 국민투표에 의하여 채택, 국가를 FLN당과 분리시킴으로써 FLN의 권력독점을 종결시켰다.

1992년 2월에는 알제리 전역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여 샤들리가 물러나고, 1994년 1월 리아민 제루알(Liamine Zeroual)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1998년 9월 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하고 1999년 4월 압델 아지즈 부테플리카(Abdel Aziz Bouteflika)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1년 4월 카빌리 지역(베르베르 언어권)의 경찰관 내에서 고교생이 경찰에 의해 발포된 유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후 발생한 소요사태로 80명 이상이 사망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2004년 4월 대선에서 83.49%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제8대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집권2기의 대내정책 목표로 국민화합, 평화, 정치안정, 치안확보, 경제 발전 등을, 대외정책 목표로 경제협력, 안보협력, 위기관리 참여 및 대외신뢰 구축 등을 내세웠다. 또 매년 회교근본주의자들에 의한 테러로 약 100~200여명이 사망하는 상황에 대해, 2005년 1월 테러 종식을 공식 선언하고, 같은 해 9월 '평화와 민족대화합'을 위한 헌장을 97%의 높은 지지율로 채택하여 테러문제 해소에 관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2009년 4월 치러진 대선에서 9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어 삼선 대통령이 되었다.

 

 

 

 

정치

1996년 개정된 헌법에 의하면 정부형태는 매 5년 대통령선거를 실시하는 헌법과 더불어 의회민주주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 대통령은 정당들이 임명하는 내각의 수반이고, 입법의 대권을 행사하는 의회는 행정부의 조치를 검열할 권리를 가진다. 현 대통령은 2004년 4월의 대선에서 압승을 거둔 압델 아지즈 부테플리카(Abdel Aziz Bouteflika)이다.

 

의회는 양원제이며, 상원은 144석(임기 6년), 하원은 380석(임기 5년)으로 이루어진다. 하원은 보통, 비밀, 직접선거로 선출(정당명부 비례대표제)한다. 의석수는 인구 8만 명에 1석, 초과 4만 명당 1명 추가, 35만명 이하의 인구를 가진 도(province)에는 최소 4석의 배당과 같은 기준에 의거한다.하원 의석수의 2/3는 면의원(APC) 및 도의원(APW) 중에서 비밀선거로 선출되며, 1/3은 대통령이 지명한다. 그리고 매 3년마다 상원의원의 절반을 교체한다. 주요 정당으로 민족민주동맹(RND), 민족해방전선(FLN), 사회주의세력전선(FFS), 이슬람구국전선(FIS, 92년 불법화), 평화사회운동(MSP), 문화민주동맹(RCD)등이 있다. 2007년 5월 치러진 총선 결과, 하원의 경우, 민족해방전선이 136석, 민족민주동맹이 61석, 평화사회운동이 52석 등을 차지했고, 상원의 경우는 민족해방전선이 29석, 민족민주동맹이 12석을 차지하였다.

 

알제리는 외교적으로 반식민·반제국·비동맹의 3대 노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알제리는 전통적으로 비동맹 외교노선을 지향하고 제3세계 국가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알제리는 중동의 리더국으로 자임하면서, 아랍연맹의 이집트 독주에 반기를 제기하고 주도권 획득에 노력하고 있다. 알제리의 주요 무역 파트너이자 실질적인 최대 수입국인 프랑스와는 경제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 유지하고 있으나, 국민들의 반(反)불정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2003년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의 알제리 방문 때부터 시도된 우호협약은 알제리 측이 프랑스의 과거사 인식을 이유로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보임으로써 아직까지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는 1974년 외교관계를 재개하고 긴밀한 경제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2004년 미국은 알제리 최대의 원유수입국임). 2001년 9.11 테러발생 이후, 알제리 내 테러리스트 척결 및 미국의 대테러 전쟁 명분과 결합하여, 2005년 7월 양국은 사하라사막 지역에서 군사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2006년 럼스펠드(Rumsfeld) 국방장관이 방문하고, 알제리의 외교장관이 방미(2006년)하는 등 양국 간 고위인사 교류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인근국인 모로코와 모리타니아와는 서부사하라 분쟁으로 소원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지만 튀니지와 리비아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30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18 개월 간의 병역 의무를 가진다(2006년 기준). 2004년 기준으로 정규군(軍)은 약 127,500명인데, 그 중 육군은 110,000명, 해군은 7,500명, 공군은 10,000명이다. 정규군 외에 보조군 181,200명과 예비군 150,000명이 있다. 2006년 기준으로 GDP 대비 국방예산의 비중은 3.3%이다.

 

 

경제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석유수출국기구)와 OAPEC(Organization of Arab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아랍석유수출국기구)의 주요 멤버로 경제 및 산업이 석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나, 한때 산유국으로서는 낮은 수준이었다. 1955년 사하라사막 일대에서 풍부한 원유와 천연가스가 발견됨에 따라 그때까지 포도주를 최대 수출품으로 하고 있던 경제와 산업이 크게 변모하였다. 1962년 독립 후 석유·천연가스 기업이 모두 국영탄화수소공사(SONATRCH)로 일원화되었으며, 석유 및 천연가스는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양을 수출하며 알제리 총수출액의 97%(2006년 기준) 이상을 차지한다.

 

1991년 이후 정치적 소요의 후유증으로 1993∼1994년 2년 연속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기까지 경제가 장기간 위축되어 오다가, 1995년 4.3%의 플러스성장을 기록한 후 1996에도 5% 내외의 비교적 높은 성장을 달성하였다. 이 같은 성장세 회복은 국제 유가상승과 기후 조건 개선에 따른 농업부문의 생산 증대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1994년 이후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의 관리를 받고 있다. 1998년에는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예정대로 종료하여 인플레율의 대폭적인 하락과 지속적인 플러스성장을 달성하였다. EU-알제리간 자유무역협정이 2005년 9월 발효되었으며, 점진적인 관세인하 및 철폐를 통해 2016년 완전 자유무역지대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포장된 활주로를 갖추고 있는 공항이 52개(2007년 기준)있으며, 내륙교통에는 3,973km의 철도망(2006년 기준)과 약 108,302km의 도로망(2004년 기준)이 있으며, 지중해 연안의 알제·오랑 두 항구와 아르주 등의 석유·천연가스 적출항이 있다.

2007년(추정치) 기준으로 총수출액은 663억 달러, 총수입액은 261억 달러로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보이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원유, 천연가스, 석유제품으로 전체 수출액의 97%를 차지하고 있고, 주요 수출대상국은(2006년 기준) 미국(27.3%), 이탈리아(17.1%), 스페인(9.4%), 프랑스(8.8%), 캐나다(8.2%), 벨기에(4.3%) 등이다. 주요 수입품은 자본재, 식료품, 소비재 등이고, 주요 수입대상국은(2006년 기준) 프랑스(22.1%), 이탈리아(8.6%), 중국(8.6%), 독일(5.9%), 스페인(5.6%), 미국(4.8%), 터키(4.5%) (2006) 등이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알제리가 독립한 1962년 7월 한국은 알제리를 승인하였으나, 알제리는 지속적인 강경사회주의 정책을 추구하여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서 공산측 안(案)에 찬성하고 서방측 안에 반대, 국제연합군 철수안에 찬성하는 등 반한정책(反韓政策)을 고수하여 왔다. 그러다가 1990년 1월 15일 한국과 대사관 설치에 합의하였으며, 그 해 4월에 정식 수교하면서 양국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해왔다. 북한과는 1963년 4월 수교하였다.

 

1967년 외무장관 최규하, 1999년 통상 교섭본부장 한덕수가 알제리를 방문하였다. 1997년 알제리의 산업·외무·재무장관이 각각 방한하였고, 2003년에는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국빈방한했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알제리를 국빈방문하여 한-알제리 경제협력을 추진하고 양국관계를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격상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양국 사이에는 경제과학기술 및 문화협력협정(1997년), 투자보장협정(1997년 가서명), 이중과세방지협약(2001년), 체육협력 약정(2001년), 알제리 부이난 신도시 건설 합의각서 체결(2007년), 스포츠교류협정(2007년), 형사사법공조조약발효(2007년) 등의 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2005년 대한(對韓) 수출은 1억 6,623만 달러, 수입은 3억 4,020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63.7%), 가전제품(17.4%), 기계류(8.3%), 석유화학제품(5.7%) 등이고, 주요 수출품은 광물성연료와 그 부산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99.9%) 그 외 (양)원피, 구리 및 알루미늄(0.1%)이 있다. 2005년 기준으로 알제리는 아프리카 국가 중 남아프리카공화국, 앙골라, 나이지리아, 이집트에 이어 제5대 교역상대국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대(對)알제리 수출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알제리의 치안상황 호전에 따른 정치 및 경제의 안정, 원유와 천연가스의 수출증가에 따른 수입 여력의 확대, 개방화를 향한 경제개혁 및 시스템의 변화 등에 기인한다. 현재 교민은 없으며 체류자만 36명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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