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20082158

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1219

제목 : 예맨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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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이다. 아라비아반도 남서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북쪽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이루며, 북동쪽으로는 오만과 국경을 이룬다. 서쪽으로 홍해(紅海), 남쪽과 동쪽으로는 아덴만(灣)에 면하고 있으며 그 너머의 아라비아해(海)를 사이에 두고 소말리아와 지부티가 있다.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남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소코트라섬과 인접한 도서(島嶼), 그 서쪽의 바브엘만데브 해협 일부, 홍해의 페림섬 및 카마란섬 등도 예멘의 영토이다. 지리적 위치로 인해 무역의 중계지, 물자의 집산지로서 크게 번영하였으며 7세기 경에는 이슬람교가 번성하였다. 오스만투르크의 점령과 철수, 1918년 영국의 점령이 반복되면서으로 분단되었으나 각 부족의 저항에 부딪혀 마침내 한 국가로 통합되었다. 전통적으로 부족 단위의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국가의 통치보다 부족의 자체 통치가 더욱 강하다. 그 때문에 부족장의 지위는 국가 통치자의 권위를 능가하는 힘과 세력을 가지며 부족 자체적인 사법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부족장의 영향력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북부 예멘지역은 이슬람 시아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행정구역은 21개 주(muhafazah)로 되어 있다.

 

 

위치 아라비아반도 서남안 홍해 입구

경위도 동경 48° 00", 북위 15° 00"

면적 527970

해안선 1906

시간대 UTC+3

수도 사나(sanaa)

종족구성 아랍인, 아프로아랍인, 남아시아인, 유럽인

공용어 아랍어

종교 이슬람교

건국일 1990년 05월 22일

국가원수/국무총리 살레(Ali abdullah Saleh)대통령(90.5 집권, 06.9 3선, 임기 7년)

국제전화 +967

정체 공화제

통화 예멘 리알(Yemen Rial, YRIs)

인터넷도메인 .ye

홈페이지 http://www.yemen.gov.ye/

 

 

역사

예멘은 인도양 몬순이 가져다주는 풍부한 강우의 혜택으로 일찍부터 농업이 상당히 발달하였다. 또한 홍해와 인도양의 중계지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선호하는 물품의 통과를 통제할 수 있게 되어 ‘행복의 아라비아(Arabia Felix)’로 불린 시바(Sheba)왕국으로 번성·유명해졌다. BC 7세기 경 대규모 관개시설건설로 농업이 발전하고 향료무역(香料貿易)에서 큰 이익을 거두어 왕조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다. 남단의 천연 양항(良港:배가 드나들거나 머무르기에 좋은 항구)인 아덴은 무역의 중계지, 물자의 집산지로서 크게 번영하였다.

 

7세기에 이르러 수니파가 티하마평야에서, 시아파계의 자이드파가 고원지대에 각각 세력을 잡았다. 9세기에 들어서 자이드파의 이맘(Imam) 야흐야 알하디가 라시드왕조를 창건하였다. 1517년 오스만투르크에게 정복되자 서유럽 나라들이 그 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힘을 보태었으나 결국 1872년 다시 오스만투르크에게 정복되었다.

한편 남부의 요충지인 아덴항(港)은 오스만투르크에 정복되었다가, 1839년에는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기선용 저탄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점령하였고, 1853년에는 자유항이 되었다. 1911년 자이드파의 이맘 야흐야는 반란을 일으켜 고원지대의 지배권을 획득하자 오스만투르크는 해안지대만 지배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국 오스만투르크가 철수하자 1918년 승전국인 영국은 이 지역을 분리하여 북예멘만 독립시키고 남예멘은 남아라비아연방에 편입시켜 계속 지배함으로써 이후 분단의 시초를 만들었다.

 

북예멘은 정치·종교 일체의 왕정을 실시하였다. 1955년에는 내각제를 도입하였으며 1962년에는 대령 아브둘라 살랄이 주도한 쿠데타로 국왕을 추방하고 공화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왕당파는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저항하였으며, 1967년 살랄 정권이 무너지고 온건파인 이리야니 정권이 탄생하여 왕당파와 화해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정권참여를 요구하는 왕당파의 요구에 내전이 지속되었으며 결국 1990년 이리야니가 왕당파의 요구를 수락하여 내전이 종식되었다.

 

영국 총독의 지배를 받던 남예멘에서는 이집트의 지원 하에 남예멘의 완전 독립을 목표로 한 남예멘해방전선(FLOSY)·인민해방전선(NLF) 등의 세력이 계속적인 반영(反英) 투쟁을 전개하여 1967년 11월 남예멘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민족해방전선의 서기장 사비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아라비아반도에서 유일한 공산 정권을 수립하였다. 1970년 11월에는 신헌법을 공포하고 국명(國名)을 예멘인민민주공화국으로 변경하였다.

 

같은 민족·언어·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분단된 후 남·북 예멘은 상이한 길을 걸었다. 북부는 왕정을 거쳐 아랍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공화정을 채택한 반면, 남부는 사회주의체제를 채택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커졌다. 이 때문에 남·북 예멘은 1979년 2월 국경 전쟁을 치를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였다. 1980년 4월 남예멘에서 온건파인 나세르 모하메드가 집권하면서 통일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81년 11월 북예멘 대통령 살레흐가 남예멘을 처음 방문하였으며, 12월에는 남북통합을 명시한 아덴협정을 맺었다. 이어 1983년에는 예멘 최고평의회가 구성되어 통일 작업이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1986년 남예멘에서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려는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통일 작업에 차질이 발생하였지만, 구소련의 개혁과 개방의 영향으로 다시 통일 분위기가 조성되어 1987년 7월 남예멘 대표단이 북예멘을 방문하여 통일에 관한 노력을 재개하기로 합의하고, 1988년 초 국경에서 양측 군대를 철수하였으며, 5월에는 국경 지대 유전의 공동 개발에 착수하였다. 1989년 11월에는 양국 정상이 회담을 갖고, 통일 예멘공화국을 수립하기로 합의하였고, 통일 헌법을 마련하여 1990년 5월 22일 남예멘의 아덴에서 재통일을 선언하고 예멘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91년 5월 16일 헌법이 제정되고 통일 이후 30개월의 과도기간을 둔 다음 인구 비례로 대통령위원회를 설치, 중요한 국정 운영을 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 북예멘 대통령 살레흐, 부통령으로 남예멘의 최고인민회의 의장 알리 살림 알리베이드가 취임하였다. 또한 북예멘 국가자문평의회와 남예멘 최고인민회의, 그리고 임명직 의원을 합쳐 301명의 통일 의회를 구성하였다.

1993년 4월 통일 후 첫 총선에서 대통령 살레흐가 이끄는 대중의회당(GPC)이 121석을 차지하여 최대당이 되었다. 여기에 알 이슬라(예멘개혁연합)와 예멘사회당 등 3대정당이 연정을 구성하여 하이데르 아부 바크르 알 아타스가 총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93년 8월 부대통령 알리 살림 알베이드는 수도 사나에서 열릴 회의에 불참하면서 그의 권력 기반인 아덴에 남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정국이 불안해졌다. 그는 자신이 속한 예멘사회주의당의 150명 당원이 계속된 정치적 폭력으로 피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연정 내부에서도 개혁에 대한 입장의 차이와 출신 지역별 이해 관계가 대립하여 심한 내분을 겪고 있어 민주화의 추진에 장애 요소가 되었다. 요르단, 오만 등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1994년 초부터 미통합 상태의 남북 예멘군대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5월 5일에는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남측은 분리독립을 선언하였으나 7월 7일 북측의 승리로 내전이 끝났고 알베이드 등 남예멘측 지도자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내전 후 대통령 살레흐는 1999년 최초의 국민투표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96.3%의 득표율로 재선되었고, 2001년 2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국회의원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등 집권기반을 강화하였다.

예멘공화국은 통일 후 외교 노선을 중립주의, 비동맹주의, 이슬람 세계와의 연대강화를 기본으로 온건한 노선을 추구하였다. 1990∼1991년의 걸프전쟁에서 이라크의 입장을 지지하고 미군을 위시한 다국적군의 대(對)이라크 응징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미국의 원조가 급감하였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예멘인(人)에 대한 사증 면제, 경제활동 자유 등 우대 조치를 중지하고 예멘인들의 취업입국을 규제하고 외교관 50명을 출국시켰으며, 약 80만 명의 예멘인 노동자들을 축출하였다. 이러한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오만과의 국경 확정 문제로 계속 대립하고 있다.

 

예멘은 미국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하고 걸프전쟁 중 취한 아랍세계와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1993년 6·7월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등을 방문하였고, 1994년 대통령 살레흐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였다. 2000년 6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협정을 체결하여 분쟁 종식 계기를 마련하였다. 2000년 10월 12일에는 아덴항에서 미국 군함이 테러로 피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001년 9월 11일 국제테러단체인 알카에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대폭발테러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예멘에 알카에다 조직 가담 혐의자 등 테러범들이 있을 것으로 보고, 예멘 정부에 테러범을 색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예멘 정부의 대테러 투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2001년 12월 알카에다 조직 가담 혐의자를 추적하던 중 부족군과의 교전으로 30여 명이 사망하였다.

 

 

 

문화

예멘은 고대부터 형성된 독특한 문화유산이 많고 신화·민속 등의 문학도 다양한 편이다. 구비문학·시·음악의 전통이 강하며 세공과 스테인드글라스, 단지 예술이 알려져 있다. 현대문학에서는 시인인 아브달라 알바라두니가 유명하다.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된 집과 형태를 보면 거주문화가 항상 자연 경관과 어울리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진흙, 벽돌, 돌을 적절히 이용하며 높은 지역에서는 4~6층 높이의 집을 짓는다. 지하층에서는 가축을 기르거나 저장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1층에는 가구, 2층에는 손님들을 위한 방, 주방과 거실은 3,4층에 둔다. 가장 높은 곳에 마프레이라고 불리는 큰 방이 있는데 이곳은 주인이 낮에 친구들을 접대하고 만나는 곳으로 이용한다. 남자들은 매일 오후에 모여 해질 때까지 순한 마취약 카트잎을 씹는 카트 파티를 한다. 여성의 의복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하며 남자들은 대개 상의와 하의가 한 벌로 된 옷을 입는다.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며 조직화된 운동이 드물어 국제 수준을 가진 선수가 거의 없다.

 

 

정치

1991년 5월 16일 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제, 의회민주주의, 복수정당제, 자본주의 경제 제도를 기본 골격으로 삼는다. 통일 후 일어난 내전 후 북예멘 대통령 대통령 살레흐가 1999년 최초의 대통령 선거에서 96.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2001년 2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국회의원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등 집권기반을 강화하였다. 살레흐는 2006년 11월 20일 77.2%로 재선되었고, 2007년 3월 31일 수상 무자와르와 각료를 지명하였다.

 

의회는 양원제로서 상원 111석은 대통령에 의하여 지명되고 301석의 하원은 6년 임기로 국민에 의하여 선출된다. 2003년 4월 27일 총선이 실시된 결과 정당별 의석 분포는 인민의회(GPC) 228석, 이슬람개혁그룹 (Islah) 47석, 예멘사회당(YSP) 7석, Nasserite 연합당 3석, 아랍민족사회바트당 2석, 독립당 14 석 등이다.

 

살레흐 대통령 집권 이후 부족 간의 갈등이 낮아져 정치는 안정되고 있으며 안보확보 차원에서 대테러근절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병역은 징병제(2년)이며 육군 6만 5000명, 해군 1,500명, 공군 3,000명을 보유하고 있다. 정규군 이외에 약 2만 명의 중앙수비군과 약 2만 명의 부족 사병이 있으며, 군사비지출은 GDP의 6.6% (2006년)를 차지해 세계 6위이다.

 

 

경제

예멘의 1인당 GDP는 1,000 달러(2006년 추산) 정도로 아랍권 최빈국의 하나이다. 산업구조는 농업 12.5%, 공업 43.8%, 서비스업 43.7%(2006년 추산)이다. 농업은 여전히 주산업이지만 대체적으로 자연 조건의 악화, 인력·영농기술의 부족 등으로 생산량이 적어 자급할 정도에 미치지 못한다. 예멘의 농업 작물 가운데 마약성 식물인 카트(Qat)재배가 증가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최근 마리브댐 완공 후 경지 정리로 농산물 증대에 노력하였으며, 걸프 전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국한 노동자들이 농업 개발에 투입되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수산업은 해안의 풍부한 어족 자원에 비해 선박의 노후, 시설의 미비 등으로 영세한 실정이다.

 

천연자원으로는 암염, 철광 등이 과거부터 비교적 오랫동안 채굴되고 있으며 1980년대 중반 다량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남부와 북부에서 발견되어 1986년 처음으로 예멘의 석유가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석유 매장량은 1990년 80∼100억 배럴로 추정되며, 1992년에는 5억 5000만 배럴로 추정되는 마실라유전이 발견되어 외국 자본의 진출이 늘고 있다. 전통공업 중 섬유산업이 상당하여 바질과 사나에 대규모 방직공장이 있다. 공업의 중심지로 발전해 온 아덴항은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하여 1991년 5월 30일 자유무역지역으로 선정되었다. 아덴은 석유정제, 해수(海水)로부터의 제염(製鹽), 화학합성, 알루미늄 공예 등이 다소 발달하였다.

 

예멘은 통일 이후 신규 투자 극대화, 지역 간 균형 발전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민간 부분의 합작 등 투자 활동 유도, 자유경제 활동의 보장, 생산 활동 권장, 물가 억제, 밀수 근절 등의 경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고, 2000년 사우디아라비와의 국경협정 체결로 양국 관계가 회복되고 유가가 오름에 따라 방만한 재정지출 축소 및 만연한 부패와의 전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율(2.6%)이 낮고, 물가상승율(14.8%, 2006년 추산)과 실업율(35%, 2003년 추산)이 높으며, 빈곤층의 비율(45.2%)이 높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2006년 11월 예멘은 아라비아 해역 구가들과 서방세계로부터 47억 달러를 지원받은 바 있다. 또한 IMF로부터 1967년 이후 4차례에 걸쳐 지원받았으나 예멘 정부의 개혁 의지가 둔화되고 실행이 지연되어 자금 지원이 연기되었다. 2002년 10월 세계은행은 예멘이 테러와의 전쟁 최전선에서 노력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여 경제적 불안정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4년 간 총 23억 달러 상당의 경제지원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2006년 수출은 82.2억 달러(80%가 석유), 수입은 50.5억 달러로서 흑자가 유지되면 발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수출은 주로 원유, 면, 커피, 건어물류, 식품, 가축, 기계장비류 등이고 주요 수출 대상국은 타이, 중국, 한국, 일본 등이며, 수입 대상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북예멘은 한국과 1985년에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남예멘은 한국과 예멘 재통일 직전인 1990년에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통일 이후 사나로 공관을 단일화하였고 1990년 12월에는 초대 한국 주재 예멘 상주대사가 부임하였다. 1998년 공관을 폐쇄하고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이 겸임하다가 2008년에 재개설되었다. 1983년 강경식 대통령비서실장, 2004년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이 예멘을 방문하였으며, 1983년 하킨 국회부의장, 1985년 부수상 겸 외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1989년부터 마리브유전 개발에 SK(주), 한국석유개발공사, 삼환기업(주), 현대 등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24.5%의 지분율로 참여하였다. 아덴항만 공사 등의 건설에도 한국업체가 진출하였다. 그외에 2001년까지 총 90만 달러 정도의 물품을 예멘에 무상 원조하였다. 2002년 기준 대(對)한국 수출은 4억 2906만 달러, 수입은 5226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 품목은 직물, 수송기계, 가전제품, 철강제품 등이고, 수출 품목은 원유, 유류제품, 금속제품, 농산물 등이다. 2000년 한국인 체류자는 6가구 25~3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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