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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776

제목 : 오만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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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오만 이슬람왕국(Sultanate of Oman)이다. 북동쪽으로 오만만(灣), 동쪽과 남쪽으로 아라비아해(海)에 면하며 서쪽으로 예멘, 북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와 국경을 접한다. 아랍에미리트에 비지(飛地, exclave)가 있다. 강력한 이슬람 군주 국가이지만 1972년 중세기적 쇄국체제로부터 탈피하고 신체제를 갖추면서 국제 신뢰가 높아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5개 지역(mintaqat)과 4개 주(muhaafaza)로 되어 있다.

 

위치 아라비안반도 남동부

경위도 동경 57° 00", 북위 21° 00"

면적 212460

해안선 2092

시간대 UTC+4

수도 무스카트(Muscat)

종족구성 아랍인, 발루치인, 남아시아인, 아프리카인

공용어 아랍어

종교 이바디 이슬람교 (75%), 수니파 이슬람교, 시아파 이슬람교, 힌두교

건국일 1650년

국가원수/국무총리 카부스(Qaboos bin Said) 국왕(1970.7.23 즉위)

국제전화 +968

정체 세습군주제

통화 오만 리얄 (Omani rial )

인터넷도메인 .om

홈페이지 http://www.omanet.om

 

 

역사

오만은 인도양 무역에 유리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오랫동안 번성하였다. AD 630년 경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16세기 초 해외로 진출한 포르투갈인이 해안의 무스카트를 점령, 약 150년 동안 이 지방을 지배하면서 아라비아만 무역을 제압하였지만 1650년 아랍인은 포르투갈인을 추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무스카트의 술탄은 그후 한동안 그 세력을 신장시켜 1730년에는 모가디슈, 몸바사, 마피아섬의 잔지바르 등과 동아프리카의 포르투갈식민지 등을 정복하였다.

 

한때 이란인이 침입하여 지배하였지만(1741∼1743년) 당시 왕조 알 아부 사이드가(家)가 발흥하여 이들을 축출하였다. 이때 영국과 우호적인 조약이 성립되었다. 그후 1856년 술탄의 사후(死後)에 영토계승분쟁(領土繼承紛爭)이 일어났으며 영국의 조정으로 잔지바르가 무스카트의 술탄으로부터 독립하였다. 19세기 초 무스카트는 동아프리카의 무스카트 오만령(領)에서 수입한 흑인노예의 유력한 시장이었지만, 1922년에 이르러 영국은 그의 해외속령(海外屬領)과 그리스도교국 간의 노예매매를 금지하는 조약을 맺고 다시 1951년부터 1951년까지 일련의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여 오만은 영국의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는 아니었다.

 

20세기 초에 무스카트의 술탄이 중앙집권적 지배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니즈와의 이맘과 분쟁을 일으켰으나 분쟁 결과 1920년 술탄은 이맘에 대하여 그의 신도(信徒)에 대한 전통적 지배권을 인정하게 되어 한동안 양자의 조화공존(調和共存)이 계속되었다. 1937년 술탄으로부터 오만 영토의 석유이권(石油利權)을 얻은 오만석유회사가 제2차 세계대전 후 탐사(探査)를 개시하였을 때 이맘은 자기의 통치지역에 대한 술탄의 주권 주장을 거부하고 탐사에 항의하였다. 1954년 이맘 칼리브가 무력투쟁을 전개하여 동생 타리부는 카이로로 망명하여 오만 이맘청(廳)을 설치하고 분리운동(分離運動)을 시작하였다.

 

1960년 아랍 10개국은 오만 문제를 영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UN의 의제로 채택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후 오만문제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그 보고서에 근거하여 1965년 12월 영국의 의존으로 인한 오만국민의 민족자결권(民族自決權)과 독립을 방해하고 있다는 취지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1970년 7월 족장단(族長團)이 술탄 사이드의 퇴위를 강요하여 그의 아들 카부스 이븐사이드 (QABOOS bin Said al-Said)가 계승하였다. 이 때 국명을 무스카트 & 오먼에서 현재의 오만 술탄(the Sultanate of Oman)으로 개칭하였다.

 

새로운 술탄은 선더스트 영국사관학교 출신의 계몽군주(啓蒙君主)로서 모든 왕족을 통합하여 지배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망명정치가의 귀국을 호소하였다. 또 정치범을 석방하였으며 동시에 국정(國政)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도모하였다. 영국과의 우호협력 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중세기적 쇄국체제(鎖國體制)로부터 탈피한 신체제하의 오만은 국제적 신뢰가 높아져 1972년 초에는 UN에 정식 가입했으며, 1975년 남부 도파르지역 좌익 반군 세력을 평정한 후 1981년 GCC(Gulf Cooperation Council:페르시아만안협력회의)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했다. 1993년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피선되었으며 2000년 WTO에 가입하였다.

 

 

 

문화

오만은 변신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도 아랍·이슬람 전통이 남아 있다. 서구식 공연이나 전시회 등은 많지 않고 반(反)이슬람적인 문화에 대한 검열이 이루어진다. 해안과 촌락에서는 일상생활이 거의 변화가 없다. 정부는 전통문화적인 요소를 강조하며, 오만의 전통적인 미술, 음악, 춤(박물관이나 공연장에서가 아닌 길거리의 공연)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다. 조각품으로 유명한 것은 은 세공품들이다. 은칼집과 은 세공 보석 등이 뛰어나다.

정치

1996년 11월 6일 술탄 카부스에 의하여 헌법에 상당하는 국가 기본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라 오만은 이슬람 군주 국가이지만 절대권력의 군주가 직접 선출한 내각과 자문기구를 두고 있다. 술탄 카부스가 국가를 대표하며(1970년 이후) 또한 수상(1972년 이후)이다. 1991년과 1997년 각각 설립한 자문평의회(Majlis Ash 'Shurah)와 국가평의회는 각각 하원과 상원에 해당되는 양원제로서 정부의 법령, 정책에 대한 심의기관으로 의회 역할을 수행하나 입법권은 없다. 자문평회의는 2003년 10월 59개 주에서 주민들에 의해 선출된 83명의 의원으로 구성되고(여성 2명), 국가 평의회(State Council)는 2004년 8월 국왕이 임명한 각계 지도자급 인사 54명(여성 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3년 10월 4일 총선 결과 임기 4년의 하원의원이 선출되었으나 정당은 없다.

 

1970년 이후 20년 동안 '20세기의 르네상스'라고 불리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함으로써 국민들의 높은 신망 속에 국왕의 절대권력에 의한 고도의 안정된 정국이 유지되었으나 생활 수준 향상에 따른 민주화 요구가 발생하였다. 이는 최근 국왕의 배려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반정부 집단인 해방인민전선(PFLO)이 남부 도파르지방 산악지대에서 계속 활동하여 정치적 불안 요소가 되고 있다. 법체계는 엄격한 율법의 코란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다.

 

1944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1970년 쿠데타에 의한 현체제가 확립되면서 통상수교거부정책에서 개방정책으로 전환하였으며, 친서방 외교노선을 유지함과 동시에 페르시아만 국가와의 관계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군사제도는 지원제로 2006년 총병력 44,100명으로 육군 2만 5000명, 공군 4,100명, 해군 4,200명, 왕실 경비대 6,400명, 준군사조직 4,400명, 외국고용병력 3,700명이다. 군사비 지출은 GDP의 11.4% (2005년)로서 세계 제 1위이다. 과거 이란, 이라크 분쟁과 남예멘 친공산 정권의 동향이 오만에게는 사면의 위협이었기 때문에 수년간 국방비는 재정 지출의 과도한 비율을 넘게 되었다. 카부스 국왕은 1980년 대에도 호르무즈 해협을 끼고 있는 국가로서 선박의 안전 항해 유지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으므로 해군력 정비,증강에 많은 군사비를 투입하였다.

 

 

 

경제

오만의 1인당 GDP는 14,400달러(2006년)이며 산업별 구성 비율은 농업 2.5%, 공업 38.8%, 서비스업 58.7%(2006년)이다. 주요 경제 수입원은 석유와 소량의 농산물 및 목축업 등이다. 기후와 지형의 제약으로 경지면적은 약 10만 ha로 50% 이상이 북부 바티나 해안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농업 인구는 19만 명이다. 오아시스농업이 주종을 이루며 산록(山麓), 와디 연안, 해안 부근 등이 중심으로 이 나라 최대의 산물인 대추야자가 재배된다. 그 외에 곡류·채소·오렌지·포도 등도 생산하고 있다.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하는 유목(遊牧)에는 낙타가 중요하며 그 품종도 우수하여 아라비아 각지로 수출된다.

 

1960년대부터 석유의 시추(試錐)가 성행하여, 석유수출이 1999년 전체 수출의 80%를 차지하고,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하지만 비(非)OPEC(석유수출국기구)의 회원국이다. 원유 매장량은 2006년 47억 배럴(세계26위), 천연가스 매장량은 8291억㎥(세계28위)이다. 1일 원유 생산량은 740,000 배럴(2006년 추산), 가스생산량은 172억㎥이다. 유가 하락으로 인한 불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 개편과 육성에 힘쓰고 있으며, 1990년 관광산업 육성을 위한 출입국 제한을 완화하였다. 1992년 4차 5개년 개발계획으로 사회간접자본 확충, 산업공단 조성 및 제조업 육성, 농수산업개발 등을 골자로 한, 석유의존에서 탈피하는 경제정책을 추진하였고, 1996년 5차 5개년 개발계획을 통해 중소기업 육성 등 산업의 다변화정책, 관광산업육성, 정부 지출 축소 및 민영화(privatization)를 통한 재정 수지 균형을 추진하였다. 2000년 10월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였다. 2006년 경제성장율이 6.6%로서 괄목할만하고 실업율이 15%인 점이 문제이다. 물가 상승율은 3%로 안정되어 있다.

 

2006년 수출은 247.3억 달러이며 수출대상국은 중국 23.6%, 대한민국 18%, 일본 10.9%, 태국 10.7%, 남아프리카공화국 7.7%, 아랍에미레이트 6.3% 등이다. 수입은 102.9억 달러이며 대상국은 아랍에미레이트 22.3%, 일본 16.4%, 미국 8.1%, 독일 5.4%, 인도 4.3% 등이다. 주요 수출품은 원유, 수산물, 금속, 의류 등이며, 슈입품은 기계 운송장비, 공산품, 및 식품 등이다. 주요 도시로서는 정치의 중심지 무스카트, 상업의 중심지로서 무역항인 마트라흐, 남부에 있는 도파르 지방의 중심도시 살랄라 등이 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오만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1974년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92년 북한과 수교하였다. 1976년 주(駐)오만 한국대사관을 설치하였고 그후 항공협정(1983), 문화협정(1994, 2001년 갱신), 중동담수화 연구소 설립 협정(1996), 한-오만 투자보장협정(2003년), 한-오만 이중과세방지협정(2005년)등을 체결하고 다수의 한국 건설업체가 진출해 있다. 1984년 주한 오만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오만은 수교 이후 우리나라에 대해 지속적인 우호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유엔 및 비동맹 등 국제무대에서도 우리의 입장을 적극 지지, 우리를 경제발전의 모델로 간주하여 각 분야에서 협력 확대를 희망하고 있다. 1997년 3월 오만 정부는 아랍권에서 최초로 KEDO 에 기여금 공여한 후 2000년 6월 추가 공여를 약속하였다. 주요 인사 교류로는 1990년 이후 석유광물 장관, 상공장관, 2007년 Macki 국가경제부장관이 방한하였으며, 우리나라는 2001년 이한동 국무총리, 2005년 이해찬 국무총리 등 많은 인사가 오만을 방문하였다. 군인사 교류도 활발하다.

 

2006년 기준 대(對) 한국 수출은 5억1300만 달러, 수입은 34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및 부품, 공기조절기 및 냉 난방기, 가정용 전자제품, 건설광산기계, 고무제품, 수산가공품, 합성수지, 철강관 및 철강선, 기계부품 등이며, 수출품은 원유, 액화천연가스가 대부분(전체수출의 99.7%를 차지)이다. 2007년 9월 기준 한국가스공사, 두산중공업, GS 칼택스 등의 기업이 진출해있으며 교민은 249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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