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20082369

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723

제목 : 요르단 글쓴이 : 중동연구소
첨부파일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요르단 하심왕국(The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이다. 북쪽으로 시리아, 북동쪽으로 이라크, 동쪽과 남쪽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서쪽으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 국경을 접한다. 사해 해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아카바만(灣)은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와 함께 소유한다. 요르단강(江) 서안 지역에 유대·그리스도·이슬람 세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이 있으며,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 후 한때 이스라엘에 점령당해 팔레스타인 갈등의 초점이 되고 있다. 행정구역은 12개 무하파자(muhafazah)로 되어 있다.

 

위치 아라비아반도 북부

경위도 동경 36° 00", 북위 31° 00"

면적 92300

해안선 26

시간대 UTC+2

수도 암만(Amman)

종족구성 아랍인 (98%), 체르케스인 (1%), 아르메니아인 (1%)

공용어 아랍어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 (92%), 그리스도교 (6%)

건국일 1946년 05월 25일

국가원수/국무총리 압둘라(ABDALLAH II) 국왕 (99.2.7 즉위)

국제전화 +962

정체 입헌군주제

통화 요르단 디나르(JD)

인터넷도메인 .jo

홈페이지 http://www.jordan.gov.jo

 

 

 

역사

요르단은 요르단강(요단강)·암몬·모압 등 구약 및 신약성서에 나오는 장소가 많아 고대부터 역사에 등장하지만 주변국의 침입이 잦아 제국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BC 600~BC 100년에 걸쳐 셈계(系)의 나바테아인(人)이 왕국을 세우고 페트라를 수도로 정하여 번영하였으나, 일시적이었으며그 뒤에는 로마제국(帝國)과 비잔틴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으며, 6세기 이후 아랍인에게 정복되어 이슬람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6세기 이후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령(屬領) 시리아의 일부가 되었고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으로 세계사에 크게 등장하였다. 이때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붕괴를 노려서 ‘아라비아의 로렌스(T.E.로렌스)’ 등을 이용하여 아랍인의 반란을 지원, 메카의 셰리프·후세인에게 아랍의 독립을 보증(1915년의 맥마흔선언)하고, 한편으로는 유대인의 시오니즘 운동에 대해서도 팔레스타인에서의 건국을 약속(1917년의 밸푸어선언)하였다. 이것이 분쟁의 화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프랑스와 서아시아 지배권의 분할(分割)을 정한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에 따라 트란스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권을 획득하였다. 아랍인의 독립선언은 무시되었고, 1923년 영국은 요르단강 동안 지역을 서안의 팔레스타인과 분리, 위임통치국 트란스요르단으로 정하고 후세인의 둘째 아들 압둘라를 왕으로 세웠다. 압둘라는 영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유명한 아랍 군단(軍團)을 설립하여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영국과 협정을 거듭하여 단계적으로 자치권을 확대, 1945년 아랍연맹에 가맹하고, 1946년 5월 트란스요르단 하심왕국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였다. 1948년의 팔레스타인전쟁에서는 이스라엘과 싸워, 다른 아랍 국가의 반대를 물리치고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의 일부를 병합, 1949년에 국명을 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고쳤다.

 

1951년 압둘라가 하심 왕가의 지배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인에게 암살당하자 아들 탈랄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병약하여 1년 만에 퇴위, 1952년에 손자 후세인 1세가 왕위를 이었다. 요르단은 국가 건립 시에는 대체로 친유럽적·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왔지만, 1948년의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요르단강 서안을 병합하였기 때문에 동안의 요르단인에 비하여 반서구(反西歐)·친아랍 민족주의 경향이 강하며 교육·경제 수준이 높은 팔레스타인인과 그 난민을 대량 자국으로 끌어들인 결과가 되었다. 그들은 후세인 왕제(王制)에 날카롭게 대립하여 정정(政情)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국왕은 유목민의 전통이 강한 동안(東岸)의 부족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그 수장(首長)들의 충성에 힘입어 반왕제파(反王制派)를 억압해왔다. 1955년에 바그다드조약에 가입한 서구측 전략의 일익(一翼)을 맡았으나 1956년의 총선거에서 반영(反英)세력이 대두하여 국왕은 아랍 군단의 영국인 총사령관을 해임시켰다. 그러나 1957년 국왕은 재차 지배권을 탈환하고 이후 미국의 정치적 지원에 의거하여 아랍 여러 나라의 보수파와의 유대를 강화하여 정권유지에 힘썼다. 그 결과 시리아·이집트(당시 아랍연합) 등 급진파와의 관계는 오히려 악화하고 국내 반왕제파의 세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에서는 요르단강 서안을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고 국가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급속히 대두한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팔레스타인해방기구) 등의 게릴라 세력이 동안에 강대한 힘을 구축하고 ‘국가 안의 국가’로서 후세인 왕제와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1970년에 들어와서는 정부군과 게릴라 세력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이집트의 조정으로 타협이 성립되긴 하였으나, 1971년에는 후세인 1세가 국내 게릴라 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여 괴멸시켰다. 이어서 1971년,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 팔레스타인인 자치구(自治區)를 만들고 이것과 동안지역을 합친 단일 ‘아랍 연합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구상을 제창하였다. 다른 아랍 국가는 이것을 팔레스타인의 완전 해방을 목표로 하는 아랍의 대의(大義)에 배반되는 것으로 보고 일제히 반발, 차례로 요르단과 단교하여, 요르단은 아랍의 고아가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73년 후세인 1세는 외교노선을 수정, 아랍 국가와의 관계개선에 나섰다.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시리아와 공동으로 아랍측 전열(戰列)에 가담하였으며, 이때 골란고원 일부를 이스라엘에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974년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열린 아랍 정상회담에서 PLO가 팔레스타인인의 정당하고 유일한 대표임을 결의하였을 때 이것을 받아들여 서안 지역의 지배를 포기하였다. 그해 11월 헌법을 개정하고 서안 지역을 통치 범위에서 떼어내고 동안 지역을 영토로 하는 요르단의 재편(再編)에 나섰다.

 

국내적으로 34년 간에 걸친 정당 활동 금지가 해제되고 20년 이상의 계엄기간에 통과된 법이 수정되는 국민헌장이 1991년 6월 채택되었다. 그해 7월 다당제에 기초한 총선거 실시 약속과 함께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정치적 자유가 진전됨에 따라 이슬람브라더스당(黨) 등 일부 야당의 총선 보이콧으로 후세인 1세가 1997년 7월 1일 국회를 해산시켰다. 그해 11월 4일 일부 야당의 총선 보이콧 가운데 실시된 총선에서는 각 정당추천 후보들이 약세를 보인 반면 전체의석 80석 중 과반수 이상이 부족대표들이 당선되었다. 1999년 후세인 1세가 사망하자 장남인 압둘라 2세가 왕위를 이었다. 1999년 2월 즉위한 압둘라 국왕은 2001년 6월 16일 하원을 해산하였으며, 7월 22일 내각에서 제출한 1인 1투표제 유지, 하원 의원수 증원 등을 내용으로 한 선거법을 승인하였다.

 

 

문화

대부분 베두인 유목민 출신인 요르단인은 타인에게 지극한 환대를 보이고 혈족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고대 베두인 삶의 방식이다. 유목민에 바탕을 둔 근대의 촌락 생활 방식은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지만 그 바탕이 되는 요소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촌락의 나이 든 여성, 때로는 젊은 여성들은 전통 의상인 길고 검은 토부(Thobe)를 입는데 어깨와 소매 등에 복잡하고 화려한 색의 작은 수를 놓아 입기도 한다. 도시 역시 전통적인 가치관이 존속하고 있다.

 

옛부터 요르단인은 관대함, 따뜻함, 친절함을 배워왔으며 요르단 사회 핵심에는 부족 간의 조화와 가족을 존중하는 사상이 많이 남아 있다. 요르단은 높은 수준의 공예로 유명하다.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들이 암만의 상점과 수도에서 떨어진 작은 마을의 시장을 채우고 있다. 이러한 공예품으로는 그릇, 장신구, 수예품, 카펫와 전통 의상 등이 있다. 암만에서는 지역적 특성의 스타일을 지닌 유리제품을 만드는 유리 부는 장인을 만날 수 있다. 베두인이 기르는 양은 모직의 중요한 공급원이다. 이러한 양털로 작은 베틀에서 여러 종류의 모직제품을 만드는데 외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판매되는 것은 아랍융단이나 카페트이다. 각각의 카페트에는 독창적인 특징과 독특한 디자인이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아랍문학 작품인 ≪천일야화≫는 요르단인의 작품이며 20세기 작가로 뛰어난 문체와 사상을 표현한 시인 무스타파 와바 앗 탈은 아랍의 주요한 시인이다.

 

 

 

정치

요르단의 정체는 입헌군주제이며 하심가(家)의 남자가 세습하는 국왕이 국가를 대표한다. 1999년 2월 7일 취임한 압둘라 2세가 국왕이다. 1952년 1월 1일 채택되고 몇 차례 수정을 거친 헌법에 따르면 국회는 양원제로서 임기는 4년이며, 국왕이 임명하는 55명의 의원이 상원을 구성하고, 하원의원(정원수 110명)은 직접선거로 뽑는다. 국왕은 총리임명권과 의회해산권, 국군통수권을 장악하고 있다.

 

의회는 하원 해산시 상원도 자동으로 해산되는데 1999년 2월 즉위한 압둘라 국왕은 2001년 6월 16일 하원을 해산하였으며, 7월 22일 내각에서 제출한 1인 1투표제 유지, 하원 의원수 증원 등을 내용으로 한 선거법을 승인하였다. 승인 후 첫번째 선거인 2003년 6월 17일 총선에서 의석 분포는 독립당 및 기타 88석, 이슬람행동전선(IAF) 16석이다. 나머지 6석은 여성 할당이다. 유권자들은 정당보다는 부족, 혈연 중심으로 투표하므로 의회의 입법부 역할은 제한적이며 입헌군주제 하의 의회 존재 여부에 의의를 두고 있다.

 

사법부은 대법원, 고등법원, 초심법원, 치안재판소, 종교재판소 등으로 구성되며 다른 아랍국에 비하여 종교 재판의 범위가 좁아 종교 분쟁, 결혼 문제 등만 종교 재판소가 다루고 나머지는 일반재판소가 담당한다.외교면에서는 친서구적(親西歐的)이며,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함과 더불어 아랍 국가와의 우호관계 촉진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중동문제에 관해서는 미국을 중개로 하는 화해 노선에 반발하고 있다.

 

1974년 경부터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 증진에 기울어졌으나 이에 맞서 후세인 1세는 시리아 대통령 아사드와의 회담(1975년)을 실마리로 급속하게 시리아와 관계를 긴밀화하여 정치·군사·경제의 각 분야에서 최고합동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977년에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와도 회담하고 PLO와도 관계를 개선할 적극적인 의사를 표시하였다. 1978년 9월 미국의 캠프데이비드에서 가진 미국·이집트·이스라엘 3국에 의한 중동평화에 관한 합의(合意), 그리고 1979년 3월의 이집트·이스라엘 간의 평화조약 체결은 요르단을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뜨렸다. 경제원조를 내세워 지지(支持)를 얻고자 하는 미국과 아랍의 대의(大義)에 대한 배반으로 보는 다른 아랍 국가와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 후세인 1세는 아랍에서의 이집트의 고립과 이란의 정변(政變)을 눈앞에 보면서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거부하였다.

 

걸프사태 이후 요르단이 이라크 지지를 표명하자 미국 등 서방측과의 관계가 소원해졌으며,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등도 암만에서 외교관을 철수하는 한편 원유공급을 중단했다. 유일한 항구인 아카바항(港)도 UN의 대(對)이라크 봉쇄조치로 기능이 정지되어 경제적 손실도 막대하고 아랍권에서의 고립도 심화되었다. 그러나 1994년 이슬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이집트와는 수차례 정상회담을 가지며 실질적인 관계 증진에 노력하였으며 중동평화 개선에 노력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또한 1999년 아브둘라 국왕의 즉위 이후 왕비가 쿠웨이트 출신의 팔레스타인인(人)인 것을 계기로 인근 국가와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병역은 지원제이며 정규군 10만 명, 예비군 3만 5000명을 보유하고 있다. GDP 대비 군사비지출은 8.6%(2006년 기준)으로 오만,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에 이어 세계 5위이다.

 

 

 

 

경제

요르단의 산업별 구성 비율은 농업 3.9%, 공업10.3%, 서비스업 85.8% (2006년 추산)로 서비스업이 기형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이것은 국토의 대부분이 불모지인 사막이거나 스텝이어서 농업이 낙후되어 있는 가운데 경제가 미국과 아랍 산유국들로부터의 원조·차관(借款)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농목업(農牧業)은 요르단강 서안과 동안의 고원 서쪽 기슭의 밀·야채 과수 재배 등이 뚜렷하며, 농산물의 반 이상이 수출되고 있다. 공업은 시멘트·피혁·식품가공 등 영세한 규모의 것이 많으나, 최근 인광석(燐鑛石) 산출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고 이것 또한 수출액의 반을 차지한다. 공업제품과 연료를 전면 수입에 의존하며, 식품 수입량도 급증하고 있다.

 

페트라 등의 사적(史蹟)에 의한 관광 수입과 해외로 나간 이민의 송금도 큰 재원이다. 요르단 최대의 무역 상대국인 이라크와는 서로 관세 혜택과 저렴한 가격으로 석유를 공급하는 일 등 경제협력이 밀접하였다. 1980년대 후반 외채의 급증과 심각한 물가상승으로 1989년 4월 폭동이 발생하는 경제난을 겪었으며, 걸프전쟁 이후 대(對)이라크 경제봉쇄의 여파와 산유국들의 경제지원 중단, 걸프전쟁을 피해 들어온 난민 등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경제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따라 요르단 정부와 IMF는 1999∼2001년 신규 융자와 경제구조 개혁을 결정하였고 요르단은 2000년 4월 WTO에 가입하였다. 2006년 수출은 52억 달러, 수입은 102.65억 달러이고 주요 수출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인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시리아, 레바논, 수입국은 이라크, 미국,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이다.

 

요르단 경제는 이러한 무역적자 이외에 높은 대외 채무(76.3억 달러), 높은 실업율 15.4% (비공식적으로는 30%, 2006년 추산), 높은 최저빈곤층(30%)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영화 추진, 세제 개혁, 투자 유치, 대외 통상협력 등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IMF의 간섭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가운데 압둘라 국왕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1999년부터 정보통신분야의 마스터 플랜이 범국가, 정부적인 차원에서 추진되고 2000년부터 IT 분야의 외국인 지분 허용 규모가 100%로 확대되었다. 이의 성공을 위해서는 교통, 통신망의 정비가 긴요하다. 도로망이 부진하여 포장된 도로가 7500km에 불과하며 505 km의 철도는 전부 협궤이다. 1948년까지 대외무역을 하이파항에 의존해 왔으나 이스라엘 점령으로 아카바를 대체 항구로 개발하였으며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고 교통 통신망이 확충된다면 지중해와 아랍간의 연결 고리 역할로 발전이 기대된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전통적으로 친서방(親西方) 국가인 요르단은 1962년에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고 UN에서도 한국에 대한 서방측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1973년의 중동전쟁 이후 천서방노선에서 중립주의적 외교노선으로 전환, 북한과도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국은 1975년 3월에 상주대사관을 설치하였으며, 무역협정(1972), 경제기술협정·문화협정(1977), 항공협정(1978)을 체결하였고, 2004년에는 투자보장 및 이중과세방지협정, 2005년 관광협력 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1983년에는 후세인 국왕, 1994년 하원의장, 1995년 청년체육장관, 1999년과 2004년에는 압둘라국왕 등 다수의 요르단 인사가 방한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1995년 건설교통부장관 오명, 2004년 외교부장관 반기문 등이 요르단을 방문하였다. 2006년 대(對)한국 수입 3억 5900만 달러, 수출 4300만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가전제품, 직물, 영상기기, 타이어 및 튜브, 자동차 부품, 무선통신기기, 냉동공조기계, 플라스틱제품, 석유화학제품, 승강기 등이며, 수출품은 비료, 동 및 동제품, 가죽제품, 알루미늄 등이다. 한국 교민 320여 명(2006년)이 거주한다. 1974년 한국건설업체들이 진출한 이후 삼성전자, 두산중공업 등이 활동 중이며 1991년부터 2006년간 약 360만 달러를 무상 지원하였다.

 

 

  • 목록으로
다음글 이라크
이전글 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