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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939

제목 : 카자흐스탄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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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카자흐스탄공화국(Republic of Kazakhstan)이다. 북쪽으로 러시아연방, 동쪽으로 중국·몽골, 남쪽으로 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카스피해(海)에 면한다. 약 120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로 우리 한민족도 9번째로 많은 약 10만 명(0.6%)이 거주한다.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면적이 넓지만 대부분 스텝 지역인 탓에 인구에서는 세계에서 62번째, 인구밀도에서는 215번째에 불과하다. 중앙아시아 최대의 자원대국으로 원유매장량이 세계 17위에 이른다. 행정구역은 14개주(oblys), 3개시(qalasy)로 되어 있다.

 

 

위치 중앙 아시아 북부

경위도 동경 68° 00", 북위 48° 00"

면적 2717300

해안선 1894

시간대 UTC+6

수도 아스타나(Astana)

종족구성 카자흐인 (53.4%), 러시아인 (30%), 우크라이나인 (3.7%), 우즈베크인 (2.5%), 독일인 (2.4%)

공용어 카자흐어, 러시아어

종교 이슬람교 (47%), 러시아정교 (44%), 개신교 (2%)

건국일 1991년 12월 16일

국가원수/국무총리 나자르바예프(Nursultan A. NAZARBAYEV) 대통령(2006.1 3선, 임기 7년)

국제전화 +7

정체 공화제

통화 텡게(Tenge)

인터넷도메인 .kz

홈페이지 http://en.government.kz/

 

 

역사

카자흐스탄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 교역로 상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양쪽의 서로 다른 문화나 산물을 연결해주어 민족의 이동과 성쇠가 복잡하였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주요 주민인 카자흐족의 기원은 15세기로 올라간다. 몽골제국을 구성하는 4개의 한국(汗國) 중 하나인 킵차크한국이 붕괴된 후, 15세기 중기에 그 일족인 샤이바니이가(家)의 아불 하일한이 우즈베크족을 이끌고 시르다리야강을 넘어서 서투르키스탄에 침입하여, 샤이바니 왕국을 세웠다.

 

이 때 일부의 집단이 분리해서 카자흐스탄(키르기스초원)의 중부와 남동부의 세미레체 지방에서 독립하여 카자흐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카자흐는 터키어로 ‘반도(叛徒)’, 즉 ‘본국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행동을 취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카자흐족 최초의 군주는 킵차크 한가(汗家)의 후예인 카심 한으로, 그 영역은 서쪽의 우랄산맥과 카스피해 북서해안에서, 동쪽으로 발하슈호(湖)에 이르렀다. 그러나 카심 한의 왕족이나 귀족이 카자흐스탄의 각지에 할거(割據)하면서 17세기 중반에 카자흐족 사회는 3개의 오르다(지역집단), 즉 대오르다(발하슈호 주변에서 시르다리야강 유역), 중오르다(키르기스초원 중부), 소오르다(아랄해 북부의 초원)로 나뉘어 카자흐 전체의 한은 없어지게 되었다.

 

카자흐족은 유목생활을 하였으나 일부는 상공업과 농업에 종사하였고, 종교는 수니파(派)의 이슬람을 믿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유목민의 관습법에 따랐다. 제정러시아는 17세기 중반에 시베리아 정복을 거의 끝내고 우랄강 유역에서 서부의 이르티시강 유역을 연결하는 서시베리아 남측에 많은 요새를 구축해서 카자흐족의 침입을 막고, 동시에 이들 요새를 중앙아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18세기 초 동방의 중가르의 침략에 고전하던 카자흐족의 한과 왕족은 차츰 러시아의 보호를 추구하게 되어 1740년에는 소오르다 등 일부가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다.

 

1760년 대오르다·중오르다를 지배하던 아브라이 한은 중가르와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한 청조(淸朝)의 군사력을 두려워해서 청조에 조공을 바치고 외교통상관계를 맺어 한의 권력을 강화함과 더불어 톈산북로[天山北路]의 일리와 우루무치와 통상을 해서 카자흐족의 말을 중심으로 한 가축과 청조의 견직물, 면포, 차 등의 교역을 19세기 중반까지 하였다. 18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카자흐스탄 중부와 남부에 진출하여, 정치·군사면의 지배를 강화하고 식민지화를 기도하였으며 1850년까지 카자흐의 한과 왕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러시아의 문화를 도입하고 카자흐스탄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이와 함께 러시아인, 카자크인(코사크인)도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에 들어 1917년 카자흐스탄 민족주의자들이 카자흐스탄의 완전자치를 요구하면서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1920년에는 카자흐를 포함해 키르기스자치공화국으로 발족, 올렌부르그를 임시 수도로 하였다. 1925년에는 카자흐스탄자치공화국이 되고 수도를 크질오르다에 두었으나 1929년 알마티로 옮겼다. 1997년 12월에 수도를 알마티에서 아크몰라로 옮겼다. 1936년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고, 1954년 구소련의 처녀지개척운동 때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카자흐에 대량으로 이주했다. 구소련의 붕괴로 1991년 12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후에도 공산당이 간판만을 바꾼 채 직접선거의 대통령제를 도입하여 공산당 제1서기가 당선되는 형태로 지도부가 계속 집권하고 있다. 이는 이행기의 정치적 혼란을 막는 데 큰 의미가 있으나 과감한 변신이 이루어지지 않아 개혁이 늦어지게 된다. 구소련 붕괴 직후, 모두가 주권국가를 표명할 때 카자흐스탄은 구소련의 영향 아래 그대로 존속하였고, 중앙아시아 국가 중 독립선언이 가장 늦어졌다. 그 이유는 중앙아시아 국가 중 북부지방과 도시를 중심으로 비교적 공업화가 진행되어 다수의 기업군이 있었고, 이 기업들이 다수의 러시아인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의 평야지대와 남동부의 산간지역의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카자흐스탄인들은 급격한 경제개혁으로 인한 이익이 러시아인에게 돌아가게 되는 손실과 성급한 민족주의의 고양이 가져올 러시아인 소외와 귀국에 따른 국가경제 피해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특히 러시아연방과의 긴 국경을 갖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신중한 대(對)러시아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최근 카자흐스탄의 정세가 안정되고 있으나 구소련 연방의 다른 국가보다 풀어야 할 민족문제가 많다. 1991년 12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Nursultan A. Nazarbayev)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경제개혁 등에 몰두하여 왔다. 1998년 제정된 신헌법에서 대통령 임기가 5년에서 7년으로 연장되고 1999년 1월 실시된 조기 대통령선거에서 나자르바예프가 총 투표자의 79%의 지지로 재선되었다.

 

 

문화

구소련이 지배하기 이전 카자흐스탄인들은 유목농경의 경제적 바탕 위에 그들만의 문화가 뚜렷했다. 17, 18세기 경 이슬람교가 유입되었으나 생활에 흡수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결과 이슬람교 초기에는 카자흐스탄의 샤머니즘, 애니미즘적 요소가 공존했다. 또한 유목민적 생활방식과 문자의 부재로 인하여 그들의 문학은 구전역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전설은 바티르(batir)라는 전쟁영웅에 관한 이야기로 15, 16세기의 코블란디-바티르(Koblandy-batir), 에르 사인(Er Sain), 에르 타르긴(Er Targyn) 등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대부분 노래 형식의 읊조림으로 행해지며 전통악기인 북이나 만돌린과 비슷한 현악기인 돔브라(dombra)와 함께 공연되기도 한다. 이후 러시아의 지배는 더 이상 카자흐스탄인들이 전통적인 유목문화를 영위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다른 구소련연방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문화적 활동, 즉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등을 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유명한 예술가로는 소비에트의회 마지막 의장이었던 소설가 아누아르 알림즈하노프(Anuar Alimzhanov), 시인 무크타르 샤크하노프(Mukhtar Shakhanov), 올즈하스 술레이메노프(Olzhas Suleymenov) 등이 있다. 그 후 소비에트 공화국의 붕괴로 카자흐스탄의 문화는 다시 자리를 찾는듯 하였으나 고급문화에 대한 대중의 이해 자체가 사라져 미국, 중국, 터키 등의 영화나 구 소련의 TV 영화, 멕시코의 TV 드라마 등의 대중 문화만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에 카자흐스탄의 문화 엘리트들은 다른 구소련 연방국가의 문화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침체를 경험하게 되었다. 겨울스포츠인 스키와 스케이팅의 인기가 많다.

 

 

 

정치

1995년 8월 30일 국민투표에 의하여 채택된 신헌법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은 대통령 중심의 의회민주주의 공화국이다. 국민에 의하여 직접 선출되는 임기 7년(연임 가능)의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고 수상 등 각료를 임명하며, 특정 상황에서는 의회 대신 법률의 효력 발령권 등 강력한 입법권을 행사한다. 2005년 12월 4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의회는 양원제로서 임기 6년의 상원의원은 47석(7석은 대통령이 임명)으로 지역 선거에서 선출되며 하원(일명 Mazhilis)은 임기 5년의 107석으로 대부분 선출된다. 하원의 9석은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카자흐스탄 인민대회에서 간접 선출된다. 상원은 대통령의 제청으로 대법원장, 대법원 판사, 최고사법위원 등의 선출, 검찰총장 임명, 대통령 탄핵소추 심의권이 있으며 하원은 입법, 예산심의권, 중앙행정부처 감독권, 대통령 탄핵소추권 등이 있다.상원의원 선거는 2005년 12월 실시되었으나 정당별 의석 분포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하원은 2007년 8월 18일 총선에서 조국당(Nur-Otan)이 98석을 획득하였다. 정당별 득표비율은 조국당 88.1%, 농업당 (NSDP) 4.6%, 아크졸당(Ak Zhol) 3.3%, 아우일당(Auyl) 1.6%, 공산인민당 1.3%, 애국당 0.8%, 무소속 0.4%이며, 7% 이상을 득표하여야만 의석 확보가 가능하다. 정당은 이념과 정책 보다는 친(親)나자르바예프, 반(反)나자르바예프로 나뉘어져 있다. 이러한 의석 분포는 군소정당의 난립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고 있는 정당제도와 야당 결집 세력의 결여 등에 기인한다. 사법부는 44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대법원, 주법원, 지방법원, 최고사법위원회 및 7명의 재판관에 의한 헌법위원회가 있다.

 

카자흐스탄의 외교는 현실외교로서 경제·정치·군사의 면에서 일관되게 러시아연방과 긴밀한 제휴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독자적인 군대를 가졌으나, 장비나 군요원의 부족으로 1992년 조인된 러시아연방과 카자흐스탄 간의 우호협력상호원조 조약에 의해 러시아연방의 지원과 안전보장을 확보하고 있다. 세미팔라틴스크에는 구소련시절의 핵실험장과 기타 군사상의 실험시설을 갖고 있었으나, 핵실험금지 조약에 조인하여, 1991년 시설이 폐지되었고, 그 후에 과학실험센터로 바뀌었으며, 우주산업기지 등 특수한 군사관계시설은 당분간 공동관리 체제로 되어 있다. 그외에 인접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집단안전보장조약에 조인하여 중앙아시아 안정의 확보를 기도하고 있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경제적 자립이 달성될 때까지 러시아연방과의 기존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것을 기본적인 외교방침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연방 외교의 서구 일변도에 따른 아시아 정책의 결여가 마찰에까지는 이르지 않고 있으나 현안으로 부상되고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연방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아시아 국가들과 교류를 확대해나가려 하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서 무역진흥의 화물수송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아시아 간선철도의 구상과 그 지선이 파키스탄·이란까지 뻗어 있어 해양의 항만과 연결된 무역확대 달성이 목표로 되어 있다. 이슬람 국가와의 외교에서는 이슬람이 유일한 종교가 아니지만, 이슬람 세계 부유한 국가와의 경제적 교류에서 얻어지는 이익의 관점에서 이슬람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하여 미국, EU 등과 석유, 천연가스의 안정적인 채굴 및 수출 확보에 중점을 두고 실질 경제 협력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국의 대(對)아프가니스탄 및 대(對)이라크 전쟁 지지를 계기로 군사협력이 확대되고 있다. 중국과는 원유 가스공동 개발 및 통상확대를 위하여 전략적 동반 관계로 격상되었다.

 

 

경제

카자흐스탄의 산업별 인구 구성 비율은 농업 5.7%, 공업 39.8%, 서비스업 54.4% (2006년 추산)이다. 원래 유목을 생업으로 했으나 목축과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500km에 이르는 이르티시카라간다 운하가 건설된 후, 오비강 좌안의 지류인 이르티시강의 물이 카자흐스탄의 중앙부로 관개되어, 1996년 기준 경지 면적은 32만 6000㎢이고 관개농지의 면적은 2만 2000㎢이 되었다. 그 결과 중앙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큰 곡창지대가 되었다.

 

농업지역은 이르티시강, 이심강의 양 하천과 시르다리야강 연안의 평야에서 봄밀이 재배되고, 남부의 크질오르다를 중심으로 한 시르다리야강 중상류 지역에서는 목화와 사탕수수가 재배의 중심이 된다. 남·북 양 지역의 중간이 반사막으로 방목축산이 이루어진다. 남동부에는 잎담배, 포도, 기타 과실이 재배되고 있다. 알마티 부근에서는 관개농업으로 생산된 사과와 야채가 풍부하다. 또한 수자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직접 지하수를 이용하는 방법이 개발되어, 사막과 반사막 지대에 수십 개의 관개 오아시스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목지 1억ha가 관개되어, 면양, 소, 말, 낙타, 돼지가 사육된다.

 

광공업의 발달은 투르크 쉬프 철도 개통과 정비에 따라서 지하자원의 개발이 이루어졌고 공장이 입지하게 되었다. 석유·석탄·철·연·아연·망간·니켈·인광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며, 석유는 서부의 엠바강 하류와 카스피해의 동북연안지대, 석탄은 중앙고지의 카라간다, 철광석은 북서부의 토볼강 연안, 구리는 중앙고지와 발하슈호 북안에서 각기 채굴된다. 특히 석유는 중앙아시아의 사우디아라비아라고 할 정도로 많아, 1991년에는 2660만t을 생산하였다. 망기쉬라크 반도 말단부에 있는 포르트셰프첸코는 근처에서 매장량이 풍부한 유전이 발굴된 후 석유화학공업단지의 건설로 형성된 신흥공업도시이다. 또한 엠바강 하류유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는 지역은 유전지대로서 아테라우 부근과 악툐베주에 정유공장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아테라우와 오르스크 간에는 송유관이 부설되어 있다. 카스피해 북부의 탱기스 유전은 그 규모가 거대해서 20세기 최후로 남겨진 대유전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 가채매장량은 90억 배럴로 추정되며(세계 17위), 서방자본과의 제휴로 일일 원유생산량 120만 배럴 생산을 목표로 시추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천연가스도 망기쉬라크반도나 아랄해의 북서연안에서 산출, 우즈베키스탄 가즐리와 러시아연방 첼랴빈스크 간의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되어 돈바스 공업지역으로 송출되고 있다. 또한 카자흐스탄의 북부, 러시아연방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카라챠가나크에는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어 이탈리아와 영국의 자본이 60년 간의 개발권을 갖고 채굴을 진행중에 있다. 카자흐스탄의 중부에는 카라간다탄전이 있어 소련 시절 3위의 산출량을 자랑하였으나 석회분이 많아 대기오염의 원인이 되어 고품질의 선별채광이 우선 과제로 되어 있다. 철광석은 북부의 루드니, 중앙부의 카라잘에서 채굴되어, 상당량이 우랄지역으로 이송된다. 테미르타우와 카자흐 고원의 제즈카즈간에서 발하슈호 북안에 걸친 지역에서는 소련 당시 제1위 구리가 산출되었으며, 카르삭파이·제즈카즈간·구루보코예 등지에서는 제련이 행해진다. 아연도 유수의 생산을 하여, 쉼켄트·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 레니노고르스크에서 정련되고 있다. 니켈광은 악툐베주, 안티몬은 첼리노그라드, 흑색금속야금은 테미르타우와 카라간다, 보크사이트광은 파블로다르 지방에서 산출, 대수력발전소가 있는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와 파블로다르에서 제련된다. 공업은 1960년대 이후 발전하여, 석유정제·야금·기계제작·화학·건설업이 성립되었다.

 

데미르타우와 카라간다의 제강, 발하슈의 구리제련, 레니노고르스크의 비철금속의 정련 공업, 잠불의 과인산비료공장, 아테라우의 석유채굴기계, 첼리노그라드와 알마아타의 농업기계, 파블로다르의 트랙터 등이 있다. 경공업으로는 각종 농산물의 가공분야로서 특히 육가공부문이 발달하여 우크라이나 다음이며, 세미팔라틴스크 등 4개소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데, 통조림의 형태로 수출된다. 그 외에 제분·피혁 ·유지·제미·제사 등의 공장이 원료산지의 근처에 설치되어 있고, 피혁가공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풍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석유·천연가스·석탄 등이 공업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고 원유 등 원료 상태로 수출된다. 철광석과 비철금속은 채광과 정련만을 현지에서 하고 가공과 최종제품은 다른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본격적인 공업화를 위해서는 유용한 천연자원과 풍부한 인적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공업화에 동원하느냐가 과제이다. 수출은 387.6억 달러, 수입은 241.2억 달러(2006년 추산)이다. 주요 수출품은 연료·석유제품,철,동 및 동제품이고 수입품은 기계류,연료·석유제품,전기제품 등이다. 수출대상국은 독일 12.4%, 러시아 11.6%, 중국 10.9%, 이탈리아 10.5%, 프랑스 7.4%, 루마니아 4.9% 등이며 수입대상국은 러시아 36.7%, 중국 19.5%, 독일 7.4% (2006년 기준) 등이다. 2006년 경제성장율은 10.6%로서 높은 편이며 그동안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한 개혁·개방정책의 추진과 원유 가스의 개발이 이러한 고도경제 성장을 가져오게 하였다. 대외채무가 734.5억 달러에 이르지만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 외국인 직접 투자의 증가로 앞날이 밝아지고 있다. 실업율은 7.4%, 물가상승율이 8.6%로 다소 불안하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카자흐스탄은 1992년 1월 28일에 한국·북한과 동시에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카자흐스탄과 한국은 1972년 무역협정, 1995년 양국간 관계 및 협력에 관한 일반원칙 선언, 과학기술협정, 문화협정, 1996년 투자보장협정, 1997년 이중과세 방지협정, 2003년 형사사범공조조약, 범죄인도조약, 2004년 원자력협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1990, 1995, 2003), 아브디카리모프 상원의장 (2001), 마미대법원장(2004)등이 방한하였으며, 노무현 대통령(2004), 전윤철 감사원장(2005), 김원기 국회의장(2005) 등이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였다. 두 국가의 경제·통상협력은 경제의 상호보완성에 기초하여 교역량이 2003년 이후 80% 이상 증가하고, 최근에는 중국을 통한 교역량 증가에 따라 다소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건축자재 및 자동차 분야 등의 약진에 따라 2006년에는 교역량이 균형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카자흐스탄의 WTO 가입추진에 따른 경제 자유화 및 국제유가 상승, 카자흐스탄의 건설수요 증가 등으로 양국간 교역량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2005년 기준 대카자흐스탄 수출 2억 7255만 달러, 수입 2억 4160만 달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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