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20083221

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636

제목 : 투르크메니스탄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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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투르크메니스탄공화국(Republic of Turkmenistan)이며, 투르크메니아(Turkmenia)라고도 부른다. 북쪽으로 카자흐스탄, 북동쪽으로 우즈베키스탄, 동남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남쪽으로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카스피해(海)에 면한다. 국명은 페르시아어(語)로 '투르크멘족(族)의 나라'라는 뜻으로, 9세기 말 이후 투르크계의 오우즈족이 이주했을 때부터 투르크멘이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자원이 풍부하여 가스 매장량이 세계 15위이며 석유 매장량도 상당하다. 행정구역은 5개주(welayat)로 되어 있다.

 

 

위치 중앙아시아 서남부

경위도 동경 60° 00", 북위 80° 00"

면적 488100

시간대 UTC+5

수도 아슈하바트(Ashkhabad)

종족구성 투르크멘인 (85%), 우즈베크인 (5%), 러시아인 (4%)

공용어 투르크멘어

종교 이슬람교 (89%), 동방정교 (9%)

건국일 1991년 10월 27일

국가원수/국무총리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2007년 2월 취임)

국제전화 +993

정체 공화제

통화 마나트(Manat)

인터넷도메인 .tm

홈페이지 http://www.turkmenistan.gov.tm/_en/

 

 

역사

투르크맨바쉬 인근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될 정도로 거주 역사가 길며 신석기 시대에 해당되는 8,000년 전에는 농경의 흔적이 코페트다크산맥 부근에서 발굴되었다. 코페트다크 북부와 테젠강 하류의 아나우(Anau) 청동기층에서 농경과 가축사육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5,000년 전에 관개수로 건설이 이루어졌음을 알게되었다. 4,000년 전에는 도기와 금속세공이 행하여져 다량의 유물이 전해진다. BC 6세기까지 카스피해 연안과 북부의 초원지대에 여러 부족이 거주하였지만 BC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당하고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5세기 이후 투르크족이 중앙아시아의 서부로 이주하면서 이 지역이 서서히 페르시아인의 거주지에서 투르크계 부족의 거주지로 변모하였다. 9세기 말 이후 투르크계의 한 부족 집단인 오우즈족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이슬람교를 수용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투르크멘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게 되었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까지 화라즘왕(Khwarazm-Shahs)의 통치를 받았고, 1219∼1221년 몽골의 칭기즈칸에 의해 정복당하였다.

 

15∼17세기에 투르크멘족은 다시 종족별·영역별로 분열되어 남부 부족은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북부지역은 히바와 부하라한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18세기 초에 페르시아는 히바와 부하라 영토를 병합하였으나, 부하라는 투르크멘족의 강한 저항으로 18세기 후반에 탈환, 재건되고 이어 마리 지역도 편입시켰다. 1860년 제정 러시아군이 카스피해로부터 침입하여 러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크라스노봇스크시를 건설하자 투르크메니스탄인은 1869∼1880년 간 러시아에 대항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884년 러시아에 굴복하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이 지역에 세력을 뻗쳤으나, 주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자카스피 반볼셰비키 지역정부가 형성되어 투르크멘 의회가 수립되었다.

 

1918년 4월 러시아 붉은 군대의 침공에 의해 투르크멘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7월 영국군의 지지를 받고 있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볼셰비키 정부가 전복되고, 독립정부가 아스하바트에 영국군의 보호하에 수립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영국군이 철수하자 1920년 붉은 군대에 의해 다시 전복되고, 1924년 10월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28년 반종교운동이 시작되었으며, 1930년대 초에는 정치적 자치운동이 지식층에서 일어났지만 구소련에 의하여 많은 지식인이 투옥되거나 처형당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경제, 환경 및 문화문제가 당면한 해결 과제로 부상하였다. 1990년 8월 주권을 선언하고 1991년 10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이후 의회나 정부도 여전히 공산 세력을 차지하는 등 보수적인 체제가 뿌리깊게 남아 있다.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Saparmurat Niyazov)가 구소련방붕괴 전인 1990년 10월에 98.8%의 득표율로 대통령에게 선출된 이후 종신 대통령이 되었지만 2006년 그의 사후 구르방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Gurbanguly Berdimuhamedov)가 대통령으로 선거에서 승리하여 선출되었다.

 

 

문화

투르크메니스탄의 문학적 전통은 자랑할만하다. 문학의 아버지는 시인이자 철학가인 프래기 막툼쿨리(1770~1840)이며 그의 언행은 코란보다 더 존경을 받았다. 막툼쿨리는 작품에서 언어의 단순함을 강조하고 세련되지 않은 지혜의 고전적 양식을 일축하여 투르크메니스탄 문학이 단순한 모방자들의 개론이 된 것에 영향을 미쳤다. 막툼쿨리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한 사람 중에서 19세기 작가인 헤미네와 인기 있는 서정시인인 몰라페네스가 있다.

 

유목민인 투르크인의 직물 기술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특히 바닥깔개뿐만 아니라 단열효과와 함께 장식적인 기능을 제공하는 융단은 붉은색의 기하학적인 문양이 아름답다.

 

 

 

정치

1992년 5월 제정된 신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중심제 권위주의 공화국이다. 직접선거에 의하여 5년 임기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행정부에는 21개 부처와 13개 국가위원회가 있다. 인민위원회(Khalk Maslakhaty)는 최고 대표기관으로 입법·행정기능은 없으나 국정에 대한 논의와 감독역할을 하며, 헌법개정과 대통령을 불신임투표에 회부할 수 있다. 인민위원회는 50명의 최고의회 의원, 60명의 지역구 선출위원, 행정부각료, 최고재판소와 최고경제재판소장, 지방위원회 의장 등 2507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대통령이 위원장이다. 니야조프(Saparmurat NIYAZOV)는 1992, 1994년의 재선출에 이어 1999년 12월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2006년 12월 그의 사후 구르방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Gurbanguly Berdimuhamedov)가 다수의 입후보 중에서 선출되어 오늘에 이른다. 입법부는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임기 5년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최고의회(Majlis)이다. 헌법 상에는 65석이지만 50석만 채워져 있고 2008년 12월에 다시 선출될 예정이다. 정당은 과거의 공산당인 투르크멘민주당(DPT), 국민전선(Aszybirlik), 이슬람부흥당(PIR) 등이 있지만 거의 투르크멘민주당의 1당 독재체제이다.

 

독립 후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CIS)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특히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터키·이란 등을 비롯한 서남아시아 국가와의 협력관계가 진전되고 있다. 1992년 UN, IMF 및 IBRD에 가입했고, 중아아시아 5개국과 집단안전 보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995년 11월 UN 총회에서 영세중립국으로 승인되었다.

 

1992년 방위법이 제정되었고, 1992년 4월까지 10만 8000명의 구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993년 구소련 군대를 기반으로 3만 4000명의 국방군이 조직되었다. 1999년 육군은 1만 4000~1만 6000명이고, 주요 장비는 530M 탱크 72대, 포 345문, 로켓 발사대 114대, 박격포 63문 등이다. 공군은 3,000명으로 항공기 218대를 보유하고 있다. 해군은 없고 국경경비대 5,000명은 1,750km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의 국경을 담당하고 있다. 군복무는 의무제로 일반적으로 18개월이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1년이다. GDP 중 군사비 지출 비율은 3.4% (2005년 추산)이다.

 

 

경제

투르크메니스탄의 GDP 구성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7.7%이지만 농업 노동력이 전체 노동자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8.2%에 이른다. 1929년 이래 농업은 집단화와 정착화가 진행되었고, 관개용 카라쿰 수로를 비롯한 인공호 건설에 따라 1960년대 이후 농목축업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인접국 우즈베키스탄이나 타지키스탄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관개에 의하여 면화가 생산되고 있지만 최근 면화와 곡물의 과도한 집약적 경작으로 생태계 파괴가 심하다. 주요 작물은 목화, 보리, 밀, 옥수수, 채소, 포도, 멜론을 포함한 과일 등이다.

 

경지의 40% 이상이 목화경작지이다. 조면기준으로 연간 40만t 이상의 고품질 목화를 산출하는 세계 10대 목화 산출국으로서, 목화주산지는 코페트다크산맥, 아무다리야강, 테젠강 중·하류 지방의 오아시스 주변의 관개지이다. 특히 아무다리야강 하류에서 전국의 1/3 이상을 산출한다. 목축은 중동부에서 성하고, 최대 사육가축은 양과 염소로 약 500만 마리가 사육되고 있으며 주종은 양질의 털이 생산되는 카라쿨(Karakul)양이다. 산간지방과 일부 관개지에서는 양잠이 성하다. 식량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독립 후 상품작물의 재배 확대로 수확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투르크메니스탄은 한국과 1992년 2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주 러시아 대사가 직을 겸임하고 있다. 2007년 6월 8일 주투르크메니스탄 상주대사관 (대사대리 상주)이 개설되고 1993년 이후 경제협력 등 양국간 협력이 증진되고 있다. 2006년 10월 한-중앙아 문화교류협회 공연단이 독립 15주년 행사에 참가하여 민간 교류가 활성화되었으며 2007년 문화, 경제사절단이 상호 방문하였다. 2006년 대한 수출은 179만 달러, 대한 수입은 597만 달러이다. 수출품은 시멘트·자동차·합성섬유사가 주종을 이룬다. 1995년~1997년간 7만 달러 정도의 우리나라의 물자지원, 1997년~2006년간 총14명의 연수생 초청이 이루어졌다. 재(在)투르크메니스탄 거주 고려인이 약 1,000명으로 추산되고 있어 중앙아시아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고려인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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