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20083360

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773

제목 : 타지크스탄 글쓴이 : 중동연구소
첨부파일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타지키스탄공화국(Republic of Tadzhikistan)이다. 북쪽으로 키르기스스탄, 동쪽으로 중국, 남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북·서쪽으로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접한다. 2002년 파미르 고원의 일부 지역과 타지키스탄의 일부 영토에 대한 중국의 반환 요구를 둘러싸고 중국과 분쟁을 일으켰고, 아직까지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국경 분쟁 중이다. 국내적으로는 근대적 독립국가 건설의 경험이 짧은 탓에 독립 후 5년간 심각한 내전을 겪었다. 행정구역은 2개주(viloyat)와 1개 자치주(viloyati mukhtor)로 되어 있다. 국명은 '타지크족(族)의 나라'라는 뜻이다.

 

 

위치 중앙아시아

경위도 동경 71° 00", 북위 39° 00"

면적 143100

시간대 UTC+5

수도 두샨베(Dushanbe)

종족구성 타지크인 (79.9%), 우즈베크인 (15.3%), 러시아인 (1.1%), 키르기스인 (1.1%)

공용어 타지크어

종교 수니파 이슬람교 (85%), 시아파 이슬람교 (5%)

건국일 1991년 9월 9일

국가원수/국무총리 라흐몬(Emomali. Rahmon)대통령 (94.11 취임, 99.11 재선, 06.11 三選, 임기7년)

국제전화 +992

정체 공화제

통화 소모니(somoni)

인터넷도메인 .tj

홈페이지 http://www.prezident.tj

 

 

역사

타지크인의 조상은 고대 박트리아인과 소구드인으로 BC 6세기까지 원시공동체룰 이루었다. BC 6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 후, BC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정복되었고, 그 제국이 분열한 후에는 구레코 박트리아에 속했으며, 중국과 로마의 교역로로 이용되었다. 7세기에는 투르크에, 8세기에는 아랍인에 정복되었다. 아랍인의 지배에 대항해서 농민운동이 일어났고, 그후 봉건적 체제가 확립되었으며, 타지크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게 되었다. 9세기 후반 부하라를 수도로 하는 사만 왕조에 속하였으나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 10세기 말 투르크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까지 번영하였다. 이 시기에 타지크의 도시·상업·수공업·과학·문학 등이 가장 번영하였다.

 

13세기에는 다른 중앙아시아와 같이 몽골의 칭기즈칸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14세기에는 티무르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이때 성립된 우즈베크 칸이 19세기 후반까지 타지크인을 지배하였으며 부하라 칸국은 동쪽의 일부 산악지역에 위치하여 그 지배권이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19세기 후반 제정러시아의 침입이 시작되어, 먼저 부하라 칸국이 멸망하였다(1866). 그 후에 타지크로의 침입이 이루어져 격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1895년 제정러시아가 점령하였다. 1916년 중앙아시아 반란 때 이에 가담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917년 구소비에트 정권이 성립될 때 투르키스탄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곧 이어 자립한 부하라 칸 아래서 반혁명이 일어났으나 1920년 대중이 적군(赤軍)에 가담하고,적군이 부하라 칸을 추적하는 가운데 각 도시를 점령, 반혁명분자가 일소되었다.

 

1924년 부하라 소비에트 인민공화국은 부하라 사회주의공화국으로 재편성되어 구소비에트연방에 가입하였고, 그후 우즈베키스탄공화국 내 타지크자치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29년 단독으로 구소비에트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의 하나가 되었지만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 1991년 9월에 독립하였다. 타지키스탄은 구소련 붕괴 후 독립국가 수립의 경험이 없어 곧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즉 당시 국가원수 대행 및 의회 의장직을 맡고 있었던 아슬로노프(Kadrennin Aslonov)가 공산당의 활동을 금지하였으나 최고회의는 이를 무력화하여 나비예프( Rakjmon Nabiyev)로 대통령을 교체하였다.

 

이어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공산당 세력에 대하여 타지키스탄 민주당이나 라스타-히즈 등의 민족주의 계열 조직, 및 이슬람 부흥당이 연대하여 대항하였다. 극도의 경제부진과 빈곤, 지역간의 큰 격차, 소수민족 집단의 다양성 등이 그 배경이었다. 이같은 국내 정치위기는 1992년에 내전으로 발전하여, 국토의 1/3이 황폐화되고, 2만 명 이상의 사망자, 40만 명의 무주택자, 그리고 13만 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으로의 난민이 나타나, 경제는 사실상 마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내전에 승리한 공산당은 이슬람 원리주의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슬람 부흥당과 같은 내부적 요인과 함께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가 직간접으로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한 외부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즉 우즈베키스탄은 자국 내의 부하라, 사마르칸트에 이슬람 세력이나 타지크인이 거주하여 타지키스탄의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세력이 신장할 것을 두려워하였고, 러시아 연방은 타지키스탄에 있는 자국민의 지위가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1994년 9월 정부와 반정부 세력 사이의 전쟁이 종식되고 그 해 11월 에모말리 라흐모노프(Emomali Rakhmonov)가 53.8%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전에 따른 평화협정에 불만을 품은 우즈베크민족 출신 전육군 대령 마흐무드 후도베르디예프가 1997년 8월 우즈베크민족이 대부분인 북부도시 후잔드에서 반란을 주도, 1998년 이들 반군 1,000여 명은 일시 후잔드시 청사를 기습 점령하여 제2 내전을 기도하였다. 이들은 조기총선과 정치범석방, 지역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정부위원회의 창설을 요구하고 연립내각구성에서 40% 지분을 요구하였지만 대통령 라흐모노프와 이슬람 야당은 반군측 요구를 묵살하였다. 1999년 9월 26일 헌법 개정과 관련하여 국민투표 실시하고 1999년 11월 언론조작, 정적 제거 등의 방법으로 라흐모노프가 97%의 득표율로 재선되었으며 2003년 6월 헌법 재개정 후 2006년 11월 라흐모노프가 76.4%의 지지율로 7년 임기의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다. 헌법 재개정은 종교정당에 대한 언급 삭제와 대통령 임기 제한 폐지를 골자로 한다.

 

 

 

문화

동지중해로부터 인도에 걸친 동서문화의 요충지에 위치한 타지키스탄은 부근의 동서양으로부터 유입된 문화요소가 많아 문화유산이 풍부하다. 그러나 1920년대 구소련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방송과 예술은 항상 정치적인 제약과 통제를 받아 왔다.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타지키스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구분하려는 구소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지키스탄의 대부분의 문학작품은 20세기까지 저자의 출신지역이나 민족에 관계 없이 한때의 문화 중심어였던 페르시아어로 쓰여졌다.

 

구소련-타지키스탄 문학의 첫 세대를 지배해 온 유명한 작가로는 교육자이기도 한 사드리딘 아이니(Sadriddin Aini), 정치적 이유로 망명해 타지키스탄에 정착했던 이란 시인 아불퀴샘 라후티(Abu'l-Qusem Lahutti), 타지키스탄 구비문학을 수집하고 타지키스탄의 사회변화를 시로 쓴 시인 미르조 투르순조다(Mirzo Tursungoda) 등이 있다. 타이무르 줄피카로프는 고대 페르시아의 작법을 응용하여 민족주의적인 감정에 호소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시인, 소설가, 단편작가, 극작가가 활동하고 있다.

 

 

 

정치

2003년 6월 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타지키스탄의 정체는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이다.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하며 총리를 포함한 각료를 임명한다. 2006년 11월 6일 에모말리 라흐모노프가 임기 7년의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2005년 총선거도 평화적으로 실시되었다. 의회는 양원제로서 상원(Majlisi Milliy)은 34석, 하원 (Majlisi Namoyandagon)은 63석이다. 2005년 3월 25일 총선 결과 타지키스탄인민민주당(PDPT) 51석, 타지크공산당(CPT) 5석, 이슬람부흥당 2석, 독립당 5석 등이다.

 

독재체제 강화로 이어지는 국내 문제와 함께 대외적으로 키르기스스탄과는 토지와 관개 용수의 공동 이용 문제로 말미암아 국경 분쟁가 발생할 여지가 많다. 인접한 아프가니스탄과는 이전부터 인적 교류가 지속되어 구소련시대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독립 후에는 거꾸로 아프가니스탄 게릴라 집단의 부족별·지역별 할거, 반목, 항쟁의 근거지가 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외교적으로 2001년 11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진행되고 있던 미군 주도 군사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미군과 프랑스 군대의 한시적인 주둔을 허용하였다.

 

구소련의 무리한 민족국경 구분은 민족간 분쟁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으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독자군이나 국경경비대의 창설을 서두르고 있으나, 사병이나 장교의 훈련학교, 병기제조공장의 대부분이 러시아 연방에 있으므로 군사문제는 상당 기간 러시아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타지키스탄은 국경경비대를 창설할 때까지 러시아의 국경경비대를 주둔시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타지키스탄의 내분으로 인한 분쟁이 주변국으로 파급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에 주둔하고 있는 국경경비대를 타지키스탄에 파견,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을 강화하여 무기유입을 막고 분쟁을 진정시키고 있다. 외교 관계는 1970년에 걸쳐 러시아와 정치·경제면에서 수직적 통합관계였기 때문에 급격한 자립이 곤란한 상태이다.

 

 

경제

경제 성장율은 7% (2006년 추산)이다. GDP의 산업별 구성 비율은 농업 23%, 공업 28%, 서비스업 49% (2006년 추산)이며, 노동력의 구성 비율은 농업 67.2%, 공업 7.5%, 서비스업 25.3% (2000년 추산)이다.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농경지는 전국토의 30%이며 이 중 약 70%는 인공관개지이다. 인공관개지의 15만 1000ha에서 벼와 옥수수 등 곡물이 재배되고, 나머지 절반 이상의 농지에서는 목화가 재배된다. 주요 농산물은 목화·곡물·사탕무·감자·포도·배·사과 등이다. 목화는 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다음으로 연간 약 90만t을 생산하고, 목화재배 면적의 1/3은 세섬유목화로 ha당 수확량은 구소련 공화국 중 최고였다. 주요 생산지는 아무다리야강 유역과 페르가나 분지 지역으로 관개사업과 개간사업에 힘입어 주요 목화 생산지로 발전했다. 목화 단일작물 재배의 성격이 강하여 곡물 생산이 부족하며 과실은 페르가나 분지를 중심으로 하여 포도·앵두·배 등이 재배된다. 축산은 가축두수의 절반 이상이 양이며, 염소·소·말·야크가 사육된다. 또한 페르가나 분지는 최고의 양잠지대이다. 비관개지에서는 곡물 외에 단섬유 아마가, 서부의 파미르 고원 하곡에서는 감자가 주로 재배된다.

 

원래 오아시스 농촌에서는 밀 등의 곡물류, 양파·오이 등의 채소류, 포도·멜론 등의 과실류, 목화 등의 다양한 농산물이 재배되었지만 러시아 연방의 원면 공급지가 되면서 목화재배지로 전락, 밀 등의 곡물재배가 정체되어 식량수입국이 되었다. 관개사업은 여러 가지 심각한 환경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관리가 부실하여 단위면적당 수확량도 감소하고 있다. 원면의 현지가공은 제면·제사의 1차 가공에 한하고, 고부가가치의 면직물과 봉제 단계의 공업은 극히 저조하여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공업 총생산 중 면·견직물이 수위를 점하며, 다음이 식품공업이다. 면방직공장은 각지에 산재하나, 후잔트의 견직물 공업단지는 총견직물 생산의 대부분을 생산한다. 각지에는 착유·육가공·포도주·양조·과실·통조림·피혁 공장 등이 있어 농·축산물의 식품가공업이 발달했다. 기계공업으로는 경운기·파종기·수확기·관개용기 등을 제조하는 농기구 제조업과, 목화 가공용의 제사 직기, 면실 착유기 등을 제조하는 기계제조업, 화학비료 농약을 만드는 화학공업 등 목화재배에 관련된 공업이 특징이다. 지하자원으로는 석유(28,000 배럴/일, 1992), 석탄·납·아연 등 비철금속이 산출된다. 전력생산은 156억kWh(1999)로, 두샨베 남서부지역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함과 더불어 알루미늄정련공장과 화학공장이 건설되었으나 채산성에 문제가 있다. 2006년 수출은 15.1억 달러, 수입은 19.5억 달러로서 수출 품목은 목화·알루미늄 등이며, 수입품은 전기·석유제품, 가스 등이다.

 

1991년 독립 이후 정치불안과 경기침체로 국민의 고통이 심해지고, 내전으로 인구의 7%에 해당되는 러시아계 주민의 절반 이상이 이출되어 전문노동자가 부족한 상태이다. 1997년 내전 당사자간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경제가 서서히 회복하고 있으며 2001년에는 10%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한때 기록하였다. 그러나 2005년 기준 전체 국민의 50~60%이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높은 실업율, 취약한 정부, 높은 대외채무, 내륙으로서의 수송에 불리한 교통 등으로 말미암아 비교적 풍부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과 은 등 귀금속을 제외하고는 장래 개발이 이루어질 전망이 아직까지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는 경제적으로 러시아에 의존하는 정책을 펴고 있으며, 1999년부터 러시와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4개국이 결성한 '4자관세동맹'에 합류하여 단일경제권을 형성할 전망이다. 많은 생필품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국제 인도주의 단체들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1인당 수력자원 비중이 세계 3번째로 높으며 로건댐이나 상투다댐 완공 투자 계획이 촉진되면 전력생산이 향상되고 수출이 가능해져 상하이협력체에 의한 중국과의 도로 개설 협력과 함께 장래가 보장될 수 있다. 미국은 남북 간의 무역 증진을 위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3600만 달러 공사비의 도로를 건설 중이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타지키스탄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92년 4월 수교가 이루어졌고, 북한과는 1992년 2월에 수교했다. 1997년 국제관계 담당 대통령 보좌관 다자발이예비치가 방한하였고 1995년 7월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였다. 2005년 개최된 제6차 정부혁신세계포럼에 라흐모노프 대통령 방한하는 일 등 최근 양국 간 고위 인사교류, 자원 공동개발 및 교역 확대 등을 통한 실질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3~2005년간 무상 원조사업 시행 대상국(총 130만불)이었다. 2006년에는 국제무대에서의 우리의 입장을 일관되게 지지해주고 있는 타지키스탄과의 협력관계 및 양국간 실질협력 잠재력 등을 감안, 약 15만불 규모를 지원하였다. 2005년 대한 수입은 1300만 달러이고 대한 수출은 2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기계류, 섬유, 전자, 화학제품 등이며 주요 수출품은 면화, 알루미늄 등이다. 2006년 3월 기준 대타지키스탄 무역은 2건, 투자액 5,800만불이다. 2003년 기준 6,000여 명의 한국 교민과 50여 명의 체류자가 살고 있다.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