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20083764

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893

제목 : 터키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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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이다. 동쪽으로 이란·아르메니아·조지아(그루지야), 남쪽으로 이라크·시리아, 북서쪽으로 불가리아·그리스와 국경을 접하고, 북쪽으로 흑해, 남쪽으로 지중해, 서쪽으로 에게해(海)·마르마라해에 면한다.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반도 전부와 보스포루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마르마라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의 발칸 반도, 동(東)트라키아 지방에 걸쳐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적 위치로 인해 역사적으로 동방과 서방의 문화를 연결하는 교차로 역할을 해왔다. 이런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역사적인 부침이 심했다.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 왕조의 후계를 잇는 국가로 18세기에 오스만 왕국이 쇠퇴하여 다른 나라에 분리 점령되거나 통치, 관할되었고 20세기 들어 터키공화국으로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에게해에서 그리스와 해역·상공·영토에 관련된 분쟁을 벌이고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터키인이지만 1984년부터는 터키 동쪽지역에 거주하는 쿠르드족(族)이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터키 정부를 상대로 유혈투쟁을 벌여왔고 최근에도 그들의 독립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행정구역은 81개주(il)로 되어 있다.

 

 

위치 아시아 대륙 서쪽

경위도 동경 35° 00

면적 780580

해안선 7200

시간대 UTC+2

수도 앙카라(Ankara)

종족구성 터키인 (80%), 쿠르드인 (20%)

공용어 터키어

종교 이슬람교 (99.8%)

건국일 1923년 10월 29일

국가원수/국무총리 귤(Abdullah Gül) 대통령(2007.8 취임)

국제전화 +90

정체 공화제

통화 터키 리라(TL)

인터넷도메인 .tr

홈페이지 http://www.cankaya.gov.tr

 

 

역사

아나톨리아는 옛날에는 동로마 제국령이었으나 11세기 이후 셀주크투르크의 등장으로 차차 이슬람화하였다. 13세기 말 여기에서 성립된 오스만투르크 제국(1297~1922)은 16세기에 아시아·유럽·아프리카까지 그 세력을 떨쳤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편으로 참전하였다. 패전을 틈타 그리스군이 본토에 침입해오자 1919년 케말 파샤(아타튀르크)가 ‘아나톨리아·루메리아 권리옹호단’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정부가 연합국과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영토를 연합국에 할양하는 등 터키의 사실상 해체를 결정하였다)을 맺자 앙카라에서 터키 대(大)국민의회를 소집하고 국민군을 조직하여 1922년 9월 그리스군을 완전히 격퇴하였으며, 11월에는 술탄제(制)를 폐지하였다.

 

1923년 7월 연합국과 체결된 로잔 조약 결과 세브르 조약의 주요부분이 폐기되어 터키는 소아시아 본토와 동부 트라키아의 확보,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국제관리 참가 등이 인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공화국 선언이 있었고 케말 파샤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권리옹호단은 공화인민당(Republican People's Party)으로 개조되었다. 1924년 칼리프제(制)가 폐지되고 주권재민(主權在民) 대국민의회를 유일한 입법기관으로 하는 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이어 승원(僧院)·영묘(靈廟) 폐쇄와 승단(僧團) 금지, 일부다처 금지, 터키모(帽)·베일 금지(1925), 법률의 유럽화, 태양력 채용(1926)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1928년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조문이 헌법에서 삭제되었다. 1931년 대국민의회에서는 공화·국가·민주·산업 국유·세속·개혁의 6개 주의가 공화국의 지도원리로서 채택되었으며, 1934년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다. 또한 에타티슴이라고 하는 국가자본주의제도를 채용하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한 결과 철강, 섬유, 제지, 화학제품, 식료품 등의 생산이 증대하였다. 한편 국제적 지위의 향상에도 노력하여 1933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고, 1936년 몽트뢰 조약에 의하여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관리권과 재군비권(再軍備權)을 회복하였으며 1937년 중동의 안정을 위하여 인접국인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과 사다바드 조약을 맺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1945년 2월 독일·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할 때까지 중립을 지켰다. 1946년 1당 독재가 종식되고 정당결성의 자유가 허용되자 젤랄 바야르가 민주당을 결성하였다. 1950년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이 공화인민당을 누르고 제1당으로 등장하였다. 바야르를 대통령으로, 멘데레스를 총리로 한 민주당 정권은 국영산업의 축소, 민간기업의 조성(助成), 민간 외자의 도입을 기본정책으로 하여 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발전, 도로·댐의 정비 등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반면 적자 재정에서 오는 인플레이션, 정부의 언론탄압 등에 대한 불만이 군부·언론계·지식층·학생들 사이에 퍼져 1960년 5월 27일 구르셀 장군의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다.

 

새로 수립된 군사정권(국가통일위원회)은 신헌법을 제정하고 전(前) 민주당 수뇌를 재판·처형했다. 정당활동이 재개되어 공정당(민주당의 후신), 신(新)터키당, 노동당 등이 결성되었다. 1961년 10월 신헌법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새 국회가 소집되고 민정이관 후 구르셀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 과반수를 넘는 정당이 없었으므로 공화인민당 총재인 이노뉴가 총리로 임명되어 3차에 걸친 연립내각이 조직되었다. 1965년 10월 총선거에서는 공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단독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좌파의 반정부활동 강화로 국내치안이 악화된 가운데 군부의 압력으로 1971년 3월 내각이 총사퇴하였으며, 이를 대신한 에림 내각에 의하여 11주의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73년 10월 총선거에서는 공화인민당이 제1당이 되었으나 단독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여 공화인민당 총재 에체비트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내각이 성립되었다.

 

1974년 2월 터키 군부는 키프로스 분쟁에 개입하여 키프로스를 장악하였다. 1977년 6월 총선거에서도 공화인민당이 제1당의 자리를 유지하였으나 안정 다수를 이루지 못하고 좌우 양진영의 대립이 깊어져 무력충돌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1978년 12월 종교갈등과 쿠르드독립운동 등 민족분규의 빈발로 정치적인 위기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79년 10월 중간선거에서 집권 공화인민당이 참패함으로써 21개월 만에 물러났다. 1980년 9월에는 육군참모총장 케난 에브렌(Kenan Evren) 주도하에 전격적인 무혈 쿠데타가 성공하여 데미렐 총리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문화

터키는 헌법상 국교를 명시하고 있지 않으나 전체 국민의 98% 이상의 절대다수가 수니파 이슬람 교도이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이 매우 중요시되며 특히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종교적 율례의 영향을 받기 쉽다. 또한 금식월(라마단)이 끝나는 날 이후의 3일과 희생절은 종교 축일로서 성대한 행사가 치러진다.

터키인의 대부분은 스포츠 애호가이며 터키에는 모든 종류의 스포츠 클럽이 있다. 특히 축구나 농구 등의 프로 스포츠가 인기가 높으며, 레슬링은 전통적인 터키의 스포츠로서 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따고 있는 종목이기도 하다. 겨울에는 스키를 즐길 수는 스키장이 각지에 있으며, 최근 새롭게 실내 빙상장이 설립되어 실내 스케이팅을 즐기고 있으나 빙질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여름에는 지중해, 에게해, 흑해 등에서 해수욕을 할 수도 있고 고급 호텔의 풀장이나 시립의 실내외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다. 골프는 아직 충분한 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으나, 이스탄불, 안탈리아(Antalya) 및 이즈미르(Izmir) 등 주요 도시에 18홀의 정규 골프장이 다수 설치되어 있는데, 앙카라에는 골프장이 없다. 또한, 각종 스포츠 용품의 구입에 있어서도 테니스 용품 등은 별 문제 없이 구입할 수 있으나, 그 외의 특수한 스포츠 용품은 구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외국인의 경우에는 지참해 가는 것이 좋다.

앙카라와 이스탄불 등 대도시에는 영화관이 많이 있으며 비교적 저렴한 요금으로 관람할 수 있고, 국립 오페라·발레 극장 외에는 연극을 위한 2, 3개의 국립극장 및 콘서트 홀이 있어, 10월부터 4월에 이르는 문화시즌에는 오페라, 발레, 연극 등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국립미술관 등에서는 회화 전시회가 개최된다.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하얀 성≫(1985)≪제브뎃씨와 아들들≫(1982), ≪흑서≫ (1990), ≪새로운 인생≫ (1994), ≪내 이름은 빨강≫ (1998), ≪눈≫ (2002), ≪이스탄불-추억과 도시≫(2003) 등 특유의 개성이 묻어나는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해 왔으며 약 40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정치

근대 터키의 정치사는 3차례의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등 격동기를 치러왔다. 제1차 헌법은 1924년 초대 대통령인 케말 파샤의 주도하에 종전까지의 정교일치(政敎一致) 전제정치를 폐하고 근대국가의 형태정비를 골자로 제정하였다. 그후 1960년 장군 구르셀(Cemal G rsel)에 의한 군부 쿠데타로 1961년 제2차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2원제 채택, 대통령의 중립입장 확보, 헌법재판소 설치 등 주로 국회 및 내각의 행동을 견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좌·우익의 정치적 테러와 노동쟁의, 20% 이상의 실업률, 연간 130% 이상의 물가앙등과 막대한 외채부담, 수출둔화 등의 요인이 적체되어 정국은 극히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이와 같은 정국불안 속에서 1980년 9월 육군 참모총장 케난 에브렌(Kenan Evren)의 무혈 쿠데타가 성공하여, 1982년 11월 케난 에브렌을 임기 7년의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안(案)과 정치적 자유를 규제하는 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1982년 상원제도 폐지되었다. 그러나 1983년 11월 군부가 지원하는 민족민주당을 뒤엎고 3년 만에 민정을 구성한 총리 외잘은 정치 테러와 경제악화로 불안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12월 경제개혁을 단행했으며, 1986년 9월 보궐선거에서도 외잘이 이끄는 모국당(母國黨,Motherland Party)이 압승하였다. 외잘(Turgut zal)은 1989년 10월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991년 10월 총선에서는 집권 모국당이 패배하고 정도당(正道黨,True Path Party)이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1992년 3월 소수민족 쿠르드족(族)의 독립요구를 군이 무력으로 진압, 쿠르드 노동당이 정부에 전면전을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군은 10월 이라크 북부 쿠르드 반군 거점을 장악하고 100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93년 5월 총리 술레이만 데미렐(S leyman Demirel)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국회는 단원제로서 550명의 직선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회의원의 임기는 5년이며 피선거권은 30세 이상이 되어야 한다. 주요 정당의 의석수는 민주좌익당 136석, 조국당 88석, 정도당 85석, 미덕당 103석, 국가행동당 127석이며, 그외는 공화인민당과 무소속이 차지하고 있다(2001.3). 2000년 5월에 헌법재판소장인 세제르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연임할 수 없다.

 

 

 

경제

터키는 서(西)아시아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근대화가 앞서 있으나 총인구의 약 70%가 농목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국민총생산의 34%, 수출의 약 83.7%를 농업이 차지한다. 경지면적은 2,660만ha로 국토의 34%를 차지하나 대부분이 소농이며 농업기술·관개시설이 뒤떨어져 토지 생산성이 낮다. 주요농산물은 밀, 보리, 옥수수 등의 곡물류인데, 아나톨리아고원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재배되는 밀은 총경작면적의 약 90%를 차지하여 자급 단계에 있다.

 

상품작물로는 목화가 곡물 다음의 중요농산물이며 국내 면업의 발달과 미국으로부터 새로운 중섬유종(中纖維種)의 도입으로 재배가 급속히 보급되어 연간 생산량이 40만t 이상에 달한다. 목화는 주로 이즈미르·아다나 지방에서 생산된다. 담배는 터키 담배로 알려져 있으며 이즈미르를 중심으로 한 에게해 연안, 삼순·트라브존 등 흑해 연안이 주산지이며 목화와 함께 주요 수출품이다. 또한 에게해로부터 남부의 지중해 연안에 걸쳐 포도·무화과·올리브·감귤류 등의 생산이 많다. 그 밖에 사탕무·차(茶)가 재배되며 트라브존 부근에는 특산물인 개암이 있다. 목축은 아나톨리아고원을 중심으로 양, 염소, 앙고라토끼, 말, 당나귀 등이 사육된다. 양털 생산이 많은 편으로 모헤어종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터키는 지하자원이 풍부하지만 석탄, 철광석, 크롬광(鑛) 외에는 조사·개발이 뒤져 있다. 석탄은 흑해 연안의 종굴다크 탄전이 주산지이며 확정매장량 5억 2000만t, 연간 산출량 650만t으로 6,300cal의 양질 점결탄(粘結炭)이다. 철광석은 동부와 서부 지역에 널리 분포하며 현재 채굴되고 있는 것은 디브리이 광산으로 연간 산출량 150만t, 60∼66%의 고품위광이다. 크롬광은 서부에서는 마르마라해 연안의 부르사, 페티예 부근의 지중해 연안, 동부의 유프라테스강 상류지방에서 산출되며 주요 수출품의 하나이다. 그 밖에 망간, 아연, 마그네슘 등의 광산물의 매장이 알려져 있다. 동부의 시리아와의 국경 근처에서는 유전 채굴이 시작되었다. 에너지 자원으로는 석탄·석유 외에 수력도 개발되어 아다나의 세이한댐, 앙카라 부근의 사리야르댐 외에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아타튀르크댐(발전능력 2400㎿), 카라카야댐(발전능력 1800㎿), 케반댐(발전능력 1330㎿) 등을 건설하였고, 2017년까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그리고 남동부의 하천 유역에 19개의 수력발전소와 22개의 댐을 단계적으로 건설하는 '동남부 지역 균형발전 국책사업(GAP)'을 추진하고 있다.

터키의 주요공업은 섬유와 철강업이다. 섬유공업 중 견직공업이 부르사를 중심으로 민간기업에 의해 영위되고 면직공업은 주로 국영기업에 의해 영위되며 이스탄불, 이즈미르, 아다나 등이 주산지이다. 양질의 점결탄과 철광석을 생산하기 때문에 철강업 발달에는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흑해 연안의 종굴다크 탄전에 가까운 카라부크에 국영 카라부크 제철공장과 미국 자본의 출자에 의한 에렐리 제철공장이 있다. 또한 국내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제2차 5개년계획 때 소련의 기술·자금 원조에 의한 연생산량 100만t 급 제철소가 동부 지중해 연안의 이스켄데룬에 1975년 완성되었다. 그 밖에 시멘트·유리·사탕무를 원료로 하는 제당공업과 정부 전매의 담배공업이 있다.

원유생산은 국내수요의 반 밖에 충족시키지 못하여 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메르신·이즈미르·바트만 등지에 정유공장이 있다. 터키는 경상적(經常的)인 수입초과국이며 미국 등의 원조로 적자를 메우고 있다. 현재 실시 중인 경제개발계획도 이러한 국민경제의 외국원조 의존으로부터의 탈피가 주목적의 하나이다. 해외진출 노동자(특히 유럽)가 상당수 있으며 그들의 송금이 무역수지 개선에 큰 역할을 한다.

터키는 1980년대 이래의 경제에 대한 국가의 관여를 줄이고 시장의 자율 기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일련의 개혁 작업을 시행하여 1990년대 초반까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보였으나 정치적 필요에 의한 방만한 재정운용과 이에 따른 재정적자 및 국가채무 급증이 주원인이 되어 1994년 극심한 불황과 재정위기를 겪었다. 1994년 터키의 경제성장률은 -6.0%로 침체를 겪었고 이후 4년간 4-8%대의 경제성장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나 같은 기간 동안 연간 50-70%에 달하는 만성적인 고 인플레이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재정적자와 이에 따른 대내외 국가채무도 계속 누적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터키 정부는 IMF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는 1999년 6월 사회복지 개혁, 정부 재정 개선, 국책은행을 비롯한 금융분야 구조조정, 공공부문의 투명성 제고, 통신 및 에너지 시장 자율화를 위한 관련 입법 등 포괄적인 경제구조 개혁프로그램 이행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2000년 말 재정적자 급증, 금융기관 부실 운영, 구조개혁 프로그램 불이행 우려 등에 따른 유동성 위기로 말미암아 2001년 터키 공화국 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또 다시 터키 정부는 엄격한 재정정책과 구조개혁 강화 등 보다 강도 높은 IMF 경제개혁 과제 이행을 조건으로 한 160억불에 달하는 구제금융지원협정을 2002년 2월에 체결하였다. 2001년에는 그동안 누적되어 온 부실요인들로 인하여 GNP 성장률 -9.4%, 소비자물가상승률 68.5%, 도매물가상승률 88.6%를 기록하였다. 2002년에는 하반기 조기총선 실시와 정의개발당(AKP)의 단독 집권 등 정치적인 안정분위기와 수출 증가 등으로 경제성장률은 당초 IMF 경제개혁프로그램에 제시된 3%를 훨씬 상회하는 7.8%를 기록하였으며 소비자물가상승률도 29.7%를 기록, 당초 35%이내 억제 목표를 달성하였다.

2003년에는 정치적 안정과 미 달러화의 약세에 기인한 터키 리라화의 강세, 이자율 하락, 물가상승 둔화로 경제전반이 안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2004년 터키는 9.9%의 경제성장, 9.32%의 물가상승률, 초단기 여신금리의 하향조정, 환율의 안정적 운용 등 성과를 기록하였으며, IMF와의 새로운 구제금융협정 타결, EU 정상회의 가입협상 시기 결정 등으로 대외신인도가 제고되었다. 2005년 1월 1일 터키 정부는 1,000,000TL을 1YTL로 바꾸는 화폐단위변경(redenomination)을 실시하여 그동안의 초인플레이션에 따른 화폐가치의 하락과 회계처리, 통계, 지급결제 등에서 발생한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2005년 터키경제는 7.6% 성장, 8.2%의 소비자물가상승율을 기록하여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10.3%의 실업율, 228억달러에 이르는 경상수지 적자 등이 나타났다.

1980년대 이후 반복되는 터키의 경제 위기와 경기 침체는 정치적 불안정에 기인하는 정부의 방만한 재정운용, 만성적인 재정적자, 정부 채무 누적, 높은 인플레이션, 이자율상승, 화폐 가치 하락 등의 악순환 연결고리를 끊지 못했기 때문아다. 특히 지하경제규모추정치가 GDP 대비 약 30-50%에 달하며, 부정기적인 정부의 세금 사면조치 등이 국민들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있어 국가 부채를 줄여나갈 수 있는 획기적인 정부수입 증대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극심한 소득분배의 불균형, 지역별 부의 편중, 대외직접투자 유입을 위한 유인장치 미비 등이 터키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또 다른 요인이다.

수출은 담배, 면화, 개암, 무화과, 건포도 등 농산물이 주종을 이루고 기타 크롬광·축산품 등도 있다. 수입은 원유를 비롯하여 기계류, 석유제품, 비료 등으로 원유를 제외하고 공업제품이 압도적으로 많다.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경제협력개발기구)로부터 경제원조를 받고 있는 관계로 무역상대국은 수출입 모두 그 가맹국이 중심이 되고 있으며 특히 독일,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 영국 등과의 무역이 많다. 무역 거래는 만성적인 수입초과국이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터키는 한국전쟁 참전국으로서 우리 나라를 혈맹 우방국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한국의 전후 경제발전을 높이 평가하면서 우리 나라와의 경제협력 증진을 희망하고 있다 . 터키는 1949년 8월14일 우리나라를 승인, 1950년 7월 한국전 참전 결정, 1957년 3월 한국과 수교하였으며, 같은 해 6월 한국 공관, 1966년 7월 유엔군 산하 터키 중대 철수, 1972년 서울 공관을 설치하였다. 1977년 12월 통상진흥 및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이스탄불 총영사관을 설치하였다. 1982년 12월 대통령 에브렌, 1991년 총리 아크불루트가 방한하였다. 1972년 사증면제협정, 1974년 문화협정, 1977년 통상진흥 및 경제기술협력협정, 1979년 항공협정, 1986년 이중과세방지협정, 1994년 투자보장협정, 1997년 섬유협정, 1999년 원자력협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터키는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북부 이라크에 전통적인 우방관계를 갖고 있는 한국이 파병한 일에 대하여 적극 환영하는 입장이다. 특히, 케난 에브렌(Kenan Evren) 대통령의 공식 방한(1982년) 및 외잘 총리의 공식 방한(1986년) 후 우리 나라의 발전상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경제발전이 터키의 경제발전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터키는 UN, IAEA 등 국제무대에서 우리 입장을 지지하고 북한과는 2001년 6월 수교하였다. 양국은 국민 정서, 언어, 관습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하여 유대감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두 나라 국민들간의 유대감이 더욱 확산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1920년대에 러시아 군대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탈출한 200여 명의 터키인이 우리나라에 집단 이주, 서울과 대구·부산 등지에서 의류·담요·직물 등을 판매하며 거주하였으나 8·15광복과 함께 모두 해외로 이주하였다. 한-터 양국간 교역은 1990년 이후 연평균 15%가 넘는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면서 1997년에는 11억대의 교역량을 기록하였다. 2000년 대한수입액 12억 600만 달러, 대한수출 5100만 달러이었는데 터키 경제불황과 국내 IMF사태의 영향으로 양국간 수입수요가 냉각됨으로써 8억불대로 급감한 후 2002년 다시 회복세로 돌아서 2003년에는 13억불대를 넘어섰다.

2004년 23억달러, 2005년 29억달러를 상회하였다. 주요 수출품은 수송기계, 전자제품, 직물, 산업기계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농산물, 철강제품, 비금속광산물, 수산물, 섬유제품 등이다. 우리나라의 대터키 투자는 2006년 6월 191,739달러이며 이 중에서 제조업이 87%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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