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20083905

작성일 : 13.01.07 | 조회수 : 748

제목 : 이란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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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일반개항

정식명칭은 이란 이슬람공화국(Jomhuri-ye Eslami-ye Iran)이다. 옛날에는 페르시아(Persia)라고 불렀으나 1935년에 '아리아인(人)의 나라'라는 뜻의 현재 국명으로 개칭하였다. 동쪽으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북쪽으로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서쪽으로 터키·이라크에 접하며, 남쪽으로는 페르시아만, 오만만을 사이에 두고 아라비아 반도와 마주하고, 북쪽으로는 카스피해(海)에 면한다. 다민족국가로서, 1970년대에 팔레비 국왕이 중동지역 패권 장악을 위해 추진했던 핵무기 개발이 1990년대 이후 다시 본격화되자 이를 막으려는 미국·이스라엘 등의 국제사회와 갈등을 빚고 있다. 행정구역은 30개주(ostan)로 되어 있다.

 

 

위치 서남 아시아 페르시아만 연안

경위도 동경 53° 00

면적 1648195

해안선 2440

시간대 UTC+3.5

수도 테헤란(Tehran)

종족구성 페르시아인 (51%), 아제르바이잔족(24%), 길락-마잔다란족 (8%), 쿠르드족 (7%), 아랍인 (3%)

공용어 페르시아어(기타 터키어, 쿠르드어, 아랍어도 사용)

종교 시아파 이슬람교(90%), 수니파 이슬람교(8%), 조로아스터교 및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 및 바하이교(2%)

건국일 1979년 4월 1일

국가원수/국무총리 아흐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zhad) 대통령(09.7 재)

국제전화 +98

정체 이슬람공화국

통화 이란 리얄(Rial)

인터넷도메인 .ir

홈페이지 http://www.president.ir

 

 

 

역사

이란은 BC 4000년 이전부터의 거주 흔적이 알려져 있고 당시의 선사시대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란고원에 처음으로 국가를 건설한 것은 BC 559년으로,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제국 건국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다리우스1세는 흑해· 나일강·인더스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등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BC 490년 그리스와 마라톤전투에서 패한 뒤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셀레우코스왕조· 파르티아제국을 거쳐, 3세기 초 사산왕조 페르시아 건국으로 다시 페르시아의 부흥시대를 맞아 400여 년간 영화를 유지하다 651년 아랍인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그 후 7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중세시대에는 타민족의 지배를 받은 이란 역사의 암흑기다. 7세기부터 11세기까지는 아랍인의 지배를 받아 이때부터 이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전통적인 파할레비문자 대신 아랍문자가, 조로아스터교[拜火敎] 대신 이슬람교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9세기에 한때 사파르왕조·사만왕조가 일어났으나 얼마 가지 못했고,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투르크계 셀주크왕조의 지배를, 이후 16세기까지는 몽골계 티무르제국(帝國)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1502년 사파비왕조가 일어나면서 강력한 이란 민족국가를 형성, 당시 수도 이스파한은 '세계의 중심'으로 불릴 만큼 큰 번영을 누렸고, 이때 비로소 시아파 이슬람교가 국교로 정해졌다. 18세기 후반부터는 투르크멘족의 카자르왕조가 창건되어 수도를 테헤란으로 옮겼다. 19세기 초 카자르왕조시대 후반에는 러시아의 압박을 받았고, 1857년에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영국과 싸워 패하였다. 이러한 대외적인 패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여전히 전제정치가 행해지자 결국 국민의 반발을 초래, 1906년 헌법 제정을 비롯해 의회 제도가 성립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국토는 전쟁터가 되었다. 그 결과 이란에 진출하려던 영국·러시아에 눌려 반식민국가 상태를 면치 못하다가, 1918년 페르시아-영국조약으로 영국보호령이 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이란 카자크 병단(兵團)의 대장(隊長) 레자한이 무력 정치개혁을 일으켜 카자르왕조를 무너뜨리고 1925년 스스로 레자샤라 칭한 뒤, 팔레비왕조의 기초를 닦았다. 레자샤는 중앙집권제를 실시하고, 치외법권의 철폐, 철도의 부설, 여성의 차도르 착용 금지 등 후진성 탈피에 노력하는 한편, 각종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국제연맹에도 가입하였다. 이어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고 지속적으로 유럽세력 배제를 위한 투쟁을 펼치는 한편, 1935년에는 국호를 이란으로 바꾸었다.

 

194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모하마드 레자샤는 민족주의 기치 아래 모든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1955년에는 중동조약기구에 가입하는 한편, 1959년에는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또 석유 수출로 얻은 막대한 수입을 바탕으로 1961년에는 농지개혁·문맹퇴치·중립외교·여성참정권 등을 골자로 하는 '백색혁명'을 단행하였으나, 이로 인해 반백색혁명 시위와 반정부 운동이 격화되었다. 1973년 제5차 5개년경제계획 시행 중 석유·중화학공업에 치우친 나머지 보수 시아파의 반(反)팔레비투쟁이 격화되기 시작해 결국 1979년 1월, 팔레비는 이집트로 망명하고, 반정부 이슬람혁명을 주도한 호메이니가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80년 9월 샤트알아랍수로와 아트그섬 영유권을 둘러싸고 이라크와 8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국제적인 고립과 막대한 인적·물적·경제적인 손실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전후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과 함께 1989년 호메이니의 사망으로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계승하고,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전후복구 및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실용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1997년 하타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에도 역시 경제난 회복을 위한 개방·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외교·국방·사법 등 실질적인 권력은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성직자와 보수파가 장악함으로써 가시적인 개혁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2001년 6월 대선에서 강력한 개혁파인 하타미가 77%의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이란의 개혁노선은 훨씬 많은 힘을 얻게 되었다.

 

 

문화

이란은 유럽·아프리카 아시아의 중간지대에 위치하여 동서문명(Silk Road)의 가교역할을 하는 한편, 북방 유목민족 문화와 인더스문명·메소포타미아문명을 흡수해 복합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나라다. 또한 복합민족국가로서 인종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90% 이상이 시아파 이슬람교를 믿는 까닭에 국가의 단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러한 종교적 단일성으로 인해 11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셀주크투르크· 몽골 등 이민족의 지배에도 동화되지 않았다. 이슬람문화권의 중심국으로서, 이슬람사원을 비롯한 건축예술이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특히 양탄자 직조 기술은 뛰어난 예술성과 장인정신으로 인해 세계에서도 명물로 손꼽힌다.

 

이슬람교 이전의 페르시아적인 조로아스터교·노루즈(Nou Roz) 등 고유문화도 이슬람 문화에 융화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란 혁명 후 국민생활의 이슬람화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금요기도회는 종교행사인 동시에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일체감과 정치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시아파 최대 종교행사는 아슈라(Ashura)로서, 제3대 이만 후세인이 전장에서 순교한 날을 기념해 전국가적인 애도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라마단(금식월)을 준수하고, 매년 이슬람 성지를 순례하는 기간인 하지(Hajj) 때는 8~9만 명의 순례객이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 성지를 방문하기도 한다. 이슬람 율법(Islamic Code)은 특히 남녀의 유별성을 강조해 여성들은 외출시에 항상 차도르를 둘러야 하지만,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과는 달리 이란에서는 개방·개혁정책에 힘입어 이러한 관습이 퇴조하고 있으며, 여성참정권도 일부 인정된다.

 

식생활은 유목·촌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날 것이나 뱀장어·조개처럼 비늘 없는 해산물은 먹지 않지만, 새우만은 예외다. 돼지고기와 개고기는 금기시한다. 이란인들은 또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고, 훼르도우시(Ferdowsi)·사디(Sadi)·하페즈(Hafez) 등 뛰어난 시인의 작품을 즐겨 읽음은 물론, 이들을 민족적 영웅으로 숭상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이슬람 문명과 이란혁명에 바탕을 두고 있던 문화·사회생활은, 그러나 1997년 8월 하타미(Khatami) 정부의 출범과 함께 2001년 현재 제2기 하타미 정부에 이르기까지 계속 개혁·개방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급격히 변해가고 있다.

 

 

 

정치

이란은 최고 성직자가 최고지도자가 되는 신정공화국체제(theocratic republic)를 채택하고 있다. 최고지도자 아래 대통령 중심의 행정부·입법부·사법부의 3권 분립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최고지도자 선임권을 행사하는 국가지도자운영회의·최고지도자를 보좌하고 장기 국가정책을 입안하는 국정조정회의·국회 통과 입법안에 대한 최종 승인권과 헌법 최고 해석권을 행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혁명수비대·혁명재판소 등 체제 수호기관을 두고 있다. 최고지도자는 국가 최고 통치권자로서 절대권력을 행사한다. 군최고통수권, 군사령관 임명권, 대통령 인준, 국정조정회의의장·사법수장·헌법수호위원회위원 임명권 등을 행사하며, 국회가 재적 2/3 찬성으로 대통령을 불신임할 경우 해임할 수도 있다. 임기는 종신직이며, 1989년 6월 4일 이후 오늘날까지 최고지도자는 하메네이(Ali Hoseini-KHAMENEI)로 제1대 지도자 호메이니가 사망한 뒤인 1989년 선임되었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직접·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고,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 9명의 부통령과 22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내각을 관장하지만, 장관을 선임할 때는 국회의 개별 인준을 받아야 한다. 대통령은 2005년 8월 3일 선출된 마무드 아마디 네자드이다. 국회는 단원제 의회인 마즐리스(Majlis)에 의해 운영되며, 의원정수는 290명이고 임기는 4년이다. 입법권을 행사하며, 국회 의결 법안은 헌법수호위원의 비준과 대통령의 서명으로 확정된다. 2004년 5월 7일 총선에서 선출된 정당별 의석 분포를 보면 보수 이슬람당 190석, 개혁당 50석, 독립당 43석, 종교소수당 5석, 기타 2석 등이다. 정당은 집권당인 이슬람공화당(IRP)이 1987년 해체된 이후 공식 정당은 없고, 정치 성향에 따라 100여 개의 정치그룹이 활동하고 있는데, 크게 개혁파와 보수파로 구분된다. 사법제도 및 정책은 이슬람화를 추진해 그 중에서도 특히 형법과 가족법이 이슬람원칙을 많이 수용하고 있으며, 사법수장의 임기는 5년이다. 재판제도는 민사·형사재판으로 구분되며, 3심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이슬람율법이 엄격하게 적용된다.

 

2001년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하타미 대통령 중심의 개혁계와 개방에 소극적인 보수파로 양분되어 있으나, 필요에 따라 협력하는 긴장 속의 공생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특히 개혁계는 1997년 대선, 1999년 2월 지방선거, 2000년 2월 총선, 2001년 6월 대선 등에서 연승함으로써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만 보수파의 개혁에 대한 반감과 이들의 군·경찰·사법·종교계·경제계 장악에서 오는 저항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2005년 6월에는 국내외 정치 분석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종교적 신앙심이 투철한 마무드 아마디 네자드 대통령이 저소득층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

 

 

 

 

경제

이란의 1인당 GDP는 8,700달러이며 산업별 인구 인구 구성 비율은 농업 11%, 공업 44.9%, 서비스업 44.1% (2006년 추산)이다. 이란은 6500만의 인구, 석유·천연가스 등 풍부한 부존자원, 인근 중앙아시아 국가로 진출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 및 오랜 역사와 전통, 문화적 긍지 등으로 말미암아 중동 지역 최대의 시장이며 높은 경제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중동 지역 안에서 공업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노동인구의 약 30%(2001년 추산)가 종사하는 농목업(農牧業)이 기간산업이지만, 기후와 지형조건 때문에 농경지는 총면적의 10%에 불과하며, 휴한지(休閑地)가 많아 실제 경작 가능한 면적은 매년 농경지 면적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낙후한 농업기술과 대토지소유제도로 인해 생산성도 낮다. 주요 농작물은 밀·보리·채소·사탕무·목화·포도·멜론 등이며, 카스피해(海) 연안에서는 벼·차·오렌지도 재배한다. 목축업은 국토 면적의 약 1/4이 목초지여서 상당히 발달, 주로 농민과 유목민에 의해 이루어진다. 산양·면양·소 등이 사육되며, 육류·모피·유류 등으로 상품화된다. 어업은 카스피해에서 산출되는 캐비아가 유명하며, 그밖에 페르시아만(灣)에서 정어리·새우 등이 많이 잡힌다.

 

석유자원은 1908년, 마스젯솔레이만(灣) 유전이 발견되면서 앵글로페르시아(지금의 브리티시) 석유회사가 상업적 채유를 시작한 이후 미국·네덜란드·프랑스의 여러 회사들이 출자한 국제재단(컨소시엄)이 발족하여 이권을 계승하였다. 또 1958년부터는 이탈리아·캐나다·독일·일본 등에도 새 광구(鑛區)의 이권이 주어졌지만 그 후 전면 국유화해 오늘에 이른다. 2006년 추산 총매장량은 약 1,384억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 캐나다 다음으로 세계 3위이며, 1일 생산량은 397만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 아시아, 미국 다음으로 세계 4위, 석유수출국기구(OPEC) 내에서는 생산량 2위를 차지한다(2005년 추산). 총생산량 가운데 68%를 수출한다. 여기서 얻은 막대한 재정은 제조업 부문에 투자되며, 1990년 이후 비석유제품의 수출 확대 정책에 따라 공업도 활기를 띠고 있다. 주요 공업은 전통적인 직물을 비롯해 식품가공·자동차·철강 등으로 숙련 노동력과 사회간접자본·원료 등의 부족으로 인해 아직까지는 낙후한 상태다. 수출품은 석유와 석유 관련 제품이 주종을 이루며, 수입품은 기계·자동차·화학제품 등이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이란혁명 후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독일·영국·이탈리아·에스파냐·일본·한국 등 유럽·동북아시아 국가가 대부분이다.

 

무역은 수출 666.7억달러, 수입 456.7억 달러 (2006년 추산)로서 100억 달러 흑자는 전년도의 21억 달러 적자를 기록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2006년 추산 약 584.6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으며, 총외채는 137.3억 달러로, 외채구조는 안정적이다. 물가상승률은 12%(2006년 추산) 내외이지만 체감물가는 20% 이상이다. 또한 물가 상승과 함께 이란 경제의 최대 과제로 꼽히는 것이 고용 문제로, 정부 당국은 2007년 추산 실업율을 15%라고 발표하고 있다. 절대 빈곤층의 비율도 40%에 이른다. 재정수지는 수입이 1108억 달러, 지출이 936.1억 달러이다(2006년 추산). 풍부한 석유자원을 바탕으로 한 석유 이권료(利權料)와 매상이윤 배당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국고수입이 주요 재정수입원이다.

 

이란의 경제는 다른 중동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석유에 의존하고, 과도한 정부보조금과 복수환율제 채택 등 비효율적 경제 운용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는데, 지속적인 개혁·개방 정책과 적극적인 대외 선린우호정책의 추진으로 대외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최근 산업화에 필요한 기술과 자본의 유입 증대에 힘입고,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입 대체산업 육성, 비석유 부문의 수출산업화, 산업 간접시설 확충 등의 산업화 정책 추진으로 상당히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 정책은 핵개발 의혹같은 외교 갈등이 해소될 때 성공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의 관계

이란은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며 중동 국가로는 최초로 한국과 교역을 한 국가이다. 1962년 10월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 1967년 4월 주(駐)이란 한국대사관이 설치되면서 관계가 긴밀해지고 한국의 대(對)유엔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1973년 10월 석유파동 이후 급격히 증대된 석유 수입을 배경으로 상품교역·건설·인력 등 여러 면에서 양국간 협력관계가 급진적으로 확대되어 1975년 8월에는 주한 이란대사관이 설치되었다. 1975년 경제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을, 이듬해 3월에는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란혁명 후 관계가 소원해져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대사대리급 관계로 변경되었다가, 1989년에야 다시 대사급 관계를 회복하였다. 북한과는 1973년 4월 수교하였다.

 

1989년 이란-이라크전쟁이 끝난 뒤 한국은 이란의 전후 복구사업과 이란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해 건설과 통상 협력이 신장되었고, 1990년대 후반에는 이란의 산업화 추진과 연계해 양국간 관계가 산업협력의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양국의 산업협력이 고도화됨으로써 한국은 이란의 2대 교역국(1999), 이란은 한국의 3대 원유공급국으로서 상호 의존성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양국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 전기·전자·자동차·선박·제철·발전·석유화학·통신·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산업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석유·가스 개발, 댐 건설 등 한국 측의 건설 분야 진출도 늘어나고 있다.

 

2006년 기준 한국은 이란과 우호조약(1969.5), 문화협정(1974.7), 경제 및 기술협력 의정서(1975.7) 무역협정(1976. 2, 2006.7 수정안 서명), 상표권 및 특허권 보호각서 교환(1976. 2), 외교관 및 관용여권 소지자의 사증면제 각서 교환(1976.11), 사회보장협정(1977.5), 수산협력 협정(1977.5), 항공협정(1998.10) ,투자보장협정(1998, 2006년 발효), 해운협정(1998년 11 가서명), 주택도시협력 양해각서(2000.5), 이중과세방지협정(2002.1. 가서명, 2006.7.6 서명) 등 협정을 체결하였다.

 

1988년 6월에는 이란 내 한국의 건설현장을 이라크가 폭격하여 한국인 노동자 13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계속 순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5년 기준 대한(對韓)수입액은 21.4억달러, 대한수출액은 35.4억 달러로서 주요 수출품은 원유·액화석유가스(LPG)·석유화학·농수산물 등이며, 이 가운데 원유가 90%를 차지한다. 수입품은 자동차·선박·전자전기·섬유 철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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