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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10.24 | 조회수 : 204

제목 : [B3 현황분석] 라승도 - 발트 3국의 러시아 흔적 지우기 글쓴이 : EU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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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3국의 러시아 흔적 지우기

 

 

20222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에스토니아에서 벌어진 전쟁 기념물 철거 작업은 발트 3국도 언제든지 러시아의 침공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심각한 안보 위기의식 속에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20228월 카야 칼라스 총리는 최대한 이른 시일에 소련 전쟁 기념물을 에스토니아에서 모두 철거하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고 그 직후 보란 듯이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 거주하는 국경 도시 나르바에서 소련 탱크 기념 조형물이 전격적으로 철거됐다. 이때 러시아계 주민의 거센 항의나 저항은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고 이런 작업은 앞으로도 공식적 차원에서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고됐다.


에스토니아에서 진행되어 온 소련군 전쟁 기념비의 철거 작업은 탈린의 러시아 흔적 지우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며 이전과 달리 공공연한 성격을 띠게 된 이러한 탈러시아화 또는 반러시아화 행보는 어제오늘의 현상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발생 배경을 갖고 있고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관계를 둘러싸고 정치·사회적으로 파장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수도 탈린과 국경 도시 나르바 등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을 포함한 에스토니아 시민들 사이에서는 전쟁 기념물 철거 등 러시아 흔적 지우기 작업을 둘러싼 에스토니아 정부 방침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이와 함께 에스토니아에 있는 바바무 점령 및 자유박물관과 전쟁박물관, 인민전선기념관 등에서는 소련 점령기 에스토니아의 역사적 기억을 통한 정체성 재구성 작업도 이전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곧 에스토니아의 탈러시아화와 반러시아주의 최근 상황만 아니라 앞으로 러시아의 관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수도 있다.


한편, 발트 3국 중에서 라트비아는 소련 시절 러시아화가 가장 많이 진행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소련 붕괴 이후 라트비아에서는 탈러시아화를 둘러싸고 원주민과 러시아 디아스포라 사이에서, 더 나아가 라트비아와 러시아 사이에서 유·무형의 신경전과 정치·사회적 논란이 다른 곳보다 더 빈번하고 첨예하게 빚어지곤 했다. 이러한 양상은 최근 러시아어 미디어의 라트비아 내 활동 규제법 제정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2021년 에길스 레비츠 라트비아 대통령이 자국에서 35%의 인구가 사용하는 러시아어를 점령의 유산으로 간주하고 시민들에게 사용 자제나 제한을 강력히 촉구했을 때도 잘 드러났다. 그렇지만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라트비아를 강타한 소련 전쟁 기념비에 대한 철거 열풍만큼 라트비아의 강력한 반러시아주의와 탈러시아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 말해 라트비아는 자국 내 소련 유산에 대한 어느 때보다도 과감한 청산 행보를 취하면서 강경한 반러시아주의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2022825일 라트비아는 수도 리가의 승전공원 기념비를 완전히 해체했다. 이 공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으로부터 라트비아 수도 리가와 나머지 지역을 해방시킨 소련 붉은 군대 병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1985년에 조성됐다. 특히 공원 중심부에는 5개의 원주로 이뤄진 79m짜리 오벨리스크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 어머니 조국세 명의 병사조각상이 서 있었다. 과거에도 이 기념비는 라트비아인들에게 해방의 상징이 아니라 재점령의 상징으로 인식됐으나 자국 내 적지 않은 러시아계 주민만 아니라 이곳을 예의주시해온 러시아 정부의 시선도 의식한 나머지 감히 철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라트비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마침내 숙원 사업을 완료하듯이 전격 해체에 나섰고 이후 20221031일 라트비아 동부 도시 다우가우필스에서 소련군 병사 기념비 두 개가 철거된 데 이어 11월 말에는 레제크네에서 러시아계 주민들이 알료샤라는 친근한 별명으로 부르는 레제크네 도시 해방자 기념비도 제거됐다.


이러한 사례는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층 더 격화된 라트비아의 반러시아주의와 탈러시아화 노선이 러시아인들에게 성역과도 같은 공간인 전쟁 기념비 해체라는 러시아 흔적 지우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라트비아 정부의 해체 대상 전쟁 기념비 69개 목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반러시아주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뤄질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은 라트비아와 러시아 정부 사이의 심각한 정치적, 외교적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어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2022129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는 마지막 남은 소련 시대 유물 가운데 하나인 안타칼니스 공동묘지의 소련군 병사 기념비가 마침내 철거되어 리투아니아와 러시아에서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벨라루스 제2전선 참전 소련군 병사 유해 3천 구가 묻혀 있는 공동묘지에서 소비에트 병사 기념비 제거는 20222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 연이어 발생한 일련의 소련 전쟁 기념비 해체와 똑같은 맥락에서 진행됐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유엔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만류했는데도 강행됐기 때문이다. 이는 독립 이후 레닌 동상 해체 같은 공산주의 상징물 등 소비에트 유산의 제거와 삭제 작업을 꾸준하게 진행해왔던 리투아니아의 탈러시아화 의지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어느 때보다도 더 결연해졌음을 잘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 기사(2022.12.20)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에서 소련군 병사 기념비 철거 작업은 2018년부터 꾸준히 진행되어왔고 2022년 말에 절정에 달했다. 흥미롭게도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리투아니아 의회는 전체주의·권위주의 체제와 그 이데올로기를 공공시설을 이용하여 선전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압도적 찬성표로 의결했다. 이러한 제도 확립은 리투아니아에서 소련 유산과 러시아 영향을 완전히 지우거나 차단하겠다는 단호한 결정으로 읽힌다. 이와 비슷한 시점인 20221212일 빌뉴스 법원은 2004년에 도시 교류 차원에서 추진되어 빌뉴스에 건설 중이던 문화비즈니스센터 모스크바 하우스의 철거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리투아니아에서 선전 기계로 기능할 소프트파워 공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러시아의 존재감과 문화적 영향력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에 앞서 20221025일에는 빌뉴스 시내의 러시아 거리를 다른 이름으로 바꾸는 결정이 내려졌고 20223월에는 빌뉴스 시내 러시아대사관 앞 거리 이름을 우크라이나의 영웅 거리로 개명했으며 이 밖에도 유명 작가 페트라스 츠비르카와 유명 시인 류다스 기라 등 소비에트 예술·문화 활동가들의 이름을 딴 거리와 공원, 극장 등 대중 공간과 장소, 시설의 명칭에서 소련과 러시아 흔적을 지우는 제도적 결정이 쏟아지고 있다.


이처럼 리투아니아의 러시아 흔적 지우기 작업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더욱 격화하여 소련군 병사 기념비 철거 등에 머물지 않고 관련 입법을 새롭게 제정하고 수도 빌뉴스의 도시 풍경에서 소련 시대 거리와 공원 이름을 바꾸는 등 소비에트와 러시아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자 하는 일련의 결행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무엇보다도 빌뉴스를 중심으로 한 도시 풍경의 재구성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리투아니아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을 촉진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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