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 132587934

작성일 : 20.02.04 | 조회수 : 224

제목 : <사회>아베 앞에 알아서 기는 日 관료들…그들은 '호모 손타쿠스' 글쓴이 : 일본연구소
첨부파일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너무 화가 나고 황당해서 먹던 음식을 그 X 얼굴에 쏟아버릴 뻔했어."
 
얼마 전 일본 외무성 관계자와 식사를 함께 했다는 정치권 유력 인사가 씩씩거리며 한 얘기다.   
 
개인적인 친분도 없는 사이, 사실상의 첫 식사 자리였음에도 '일본=민주주의가 성숙된 합리적 정치 선진국, 한국=권위주의 티를 벗지 못한 정치 후진국'이란 인식을 당당하게 드러내더라는 것이다.
 
한·일 관계 개선 방안과 관련해서도 "한국과 일본이 함께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일본에 묻지 말고, 한국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서 오라는 게 일본 정부의 입장"이란 이야기만 들었다고 한다.    


비슷한 봉변을 당한 사람들은 또 있다.  

 
지난해 10월 나루히토(徳仁) 일왕(일본에선 천황)의 즉위 행사 참석차 일본을 찾은 이낙연 총리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회담한 직후 도쿄를 방문했던 한국의 중견 언론인들이다.    
 
심포지엄 등에서 마주한 일본 정부 관계자들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당시 일본 관료들은 이런 취지의 주장을 폈다고 한다.     
 
"청구권협정의 문자 하나하나를 몇 번씩 읽어보고, 당시의 교섭 기록을 봤지만 징용문제와 관련해선 (한국이) 어떠한 주장도 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한국은 '3권분립'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국내 사정이고 자기네 집 사정이다", "이낙연 총리께서 ‘한국도 청구권 협정을 존중하고 있다’고 아베 총리에게 말씀하셨는데, 진짜로 준수하셨으면 좋겠다", "(징용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은 한국 정부가 한국 국내에서 하는 것이다. 국제법 위반 상황을 시정하는 해결책을 내주기를 매일매일 기원하고 있다"….
  
딱딱한 태도와 비아냥대는 듯한 발언에 한국 언론인들 사이에선 "'노'(NO)라고 잘라 말하면 외교관 자격이 없다는데, (일본 측)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벽과 마주하는 느낌이다", "법적인 문제를 넘어서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게 외교관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타협책을 찾아야 할 외교관들조차 공사석을 불문하고 아베 총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유력언론의 논설위원은 "아베 총리가 만 7년을 넘기는 초장기 집권을 이어가면서 일본 관료들의 이른바 '손타쿠(忖度· 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행동한다) 문화'가 전 부처로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타국과의 관계를 다루는 외교 분야의 특성 때문에 외무성은 지금까지 어느 정도 독립적인 판단을 견지해왔지만 총리관저 주도 외교가 이어지면서 최근엔 일부 관료들 사이에서 '아베 코드'에 자신을 맞추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손타쿠'는 일본 관료들의 특징을 꿰뚫는 표현으로 주목받으며, 2017년엔 ‘올해의 유행어’로 선정됐다.   
 
원래는 윗사람의 분위기와 심기를 잘 살핀다는 좋은 의미로도 쓰였지만, 사학재단 스캔들 등에서 아베 총리에게 굽신대는 공무원들의 행태가 드러나면서 ‘알아서 긴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내각관방·내각부 등 총리를 직접 보좌하는 부처뿐 아니라 최고 엘리트 집단인 재무성과 외무성 등 관료사회 전체로 손타쿠 문화가 확산되면서 일본 사회에선 현생인류의 학명인 '호모 사피엔스'에 빗대 '관료=호모 손타쿠스'라는 자조적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최근의 압권은 아베 내각의 지지율을 10% 가까이 떨어뜨린 '벚꽃 보는 모임', 그리고 이에 대한 일본 관료들의 대처다. 최고 수준의 손타쿠가 연일 작렬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리 자신이 세금으로 주최하는 '벚꽃 보는 모임'에 야마구치현 지역구 후원회 관계자들이 800명 넘게 초대받은 사실이 들통나면서 시작된 스캔들이다.
 
아베 총리의 추천 몫으로 불법 다단계 판매 기업인이 포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총리 부인 아키에 여사의 동창회 같았다"는 증언이 쏟아졌지만, 명부를 관할하는 내각부 공무원들은 '아베 철통 수호'태세다.  
 
2019년 초청자 명단은 야당 의원이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했던 바로 그 날 파기됐다. 그래도 내각부는 "우연의 일치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파기했다"고 버티고 있다.
 
멀쩡히 존재하는 자료도 2개월 넘게 "없다"고 감추고, 아베 총리와 관련된 질문엔 "의원 신분과 관련된 활동이라 말 못한다"며 '아베 구하기'에 몸을 던진다. 
 

국민들로부터 '호모 손타쿠스'란 비판이 쏟아져도 관료들이 눈을 질끈 감고 맹목적인 충성을 다짐하는 건 총리관저가 틀어쥔 인사권이 두렵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2014년 총리관저 관할하에 내각인사국을 발족시켜 과거 각 부처의 판단에 맡겼던 심의관급 이상 각 부처 간부직원 600여명의 인사를 사실상 장악했다.  
 
절대적인 인사권을 쥔 총리관저가 관료사회 전체를 일사불란한 손타쿠 태세로 정렬시킨 모양새다.  
 
2018년 일본을 뒤흔들었던 재무성의 사학재단 스캔들 관련 문서조작, '벚꽃 보는 모임'과 관련된 공문서 부실 관리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잉태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베 정권과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요미우리 신문의 정치부장까지도 최근 칼럼에서 "내각인사국 발족으로 총리관저가 인사권을 쥔 이후 관료들은 자신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도 반론을 하지 못한다", "관료들의 ‘관저 퍼스트’가 ‘국민 퍼스트’를 대체했다"고 썼다.
  


출처: 중앙일보 2020.02.03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