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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6.10 | 조회수 : 259

제목 : 러시아의 급소, 우크라이나(2014.03 중앙일보) 글쓴이 : 러시아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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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완석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러시아연구소장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던 우크라이나 사태가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자국민 보호 명목으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접수한 군 병력에 대해 원대복귀를 명령했다. 우크라이나 문제를 논의하는 특별회담을 하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요청도 수락했다. 대화채널을 통해 우크라이나 위기의 외교적 해법이 모색되고 있지만 여전히 무력충돌 위험은 남아 있다.

2004년 ‘오렌지 혁명’처럼 친 서구로의 권력 변동을 초래한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에 푸틴이 아주 민첩하고, 치밀하게 군사행동을 취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나토 및 유럽연합(EU)과의 경계선에 위치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국익 수호와 영토적 안전보장, 위대한 강대국 러시아의 재건을 좌우하는 사활적 이해가 걸린 국가이기 때문이다.

먼저 EU와 나토의 동진 팽창을 차단하는 대항마로서 러시아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유라시아연합(EAU) 창설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 최대의 영토면적(60만3700㎢), 4500만 인구, 풍부한 지하자원, 강한 근육질의 산업구조를 갖추고 있다. 독립국가연합(CIS) 구성국 가운데 국력의 총합에서 러시아 다음인 우크라이나가 서구에 포섭될 경우, CIS 국가들을 규합해 EAU라는 정치·경제·안보공동체를 만들려는 푸틴의 구상은 벽에 부닥치고, 파편화된 CIS는 적자만 나는 몇몇 친러 국가들만의 친목단체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크라이나의 탈(脫)러시아화는 심각한 안보위기도 초래한다. 나토의 동진이 중동부 유럽에 이어 안보적 완충지대인 우크라이나마저 가로지를 경우 러시아는 나토와 직접 맞대면해야 한다. 이는 러시아의 전략적 방어 ‘종심(縱深)’을 훨씬 동쪽으로 후퇴시켜 안보적 취약성을 영속화시킨다.

전략적 요충지 흑해 연안 지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 종식도 큰 문제가 된다. 18세기말 예카테리나 여제 이래 부동항 흑해는 지중해 진출의 유일한 출구로서 전통적으로 러시아제국의 성장과 유럽 열강으로의 국제적 지위 확보에 기여한 중요한 전략적 통로였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흑해함대는 분할되었고, 그 모항 세바스토폴 군사기지와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에 귀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서방화는 흑해에 대한 러시아의 접근을 제한하면서 제해권 장악을 어렵게 하고, 러시아 해군력의 대(對)유럽 투사 능력을 저하시킨다. 또 제2의 황금바다로 불리는 카스피해 연안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약화시켜 에너지 자원 개발과 파이프라인 건설을 둘러싼 열강들 간의 경쟁에서 러시아의 경제적 이권도 현저히 침식시킨다.

결론적으로 모스크바에 우크라이나 상실은 제국적 부활의 추동력 상실을 의미한다. 미국의 대표적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표현대로 우크라이나 없이는 러시아가 제국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제국적 야망을 억제하는 지정학적 ‘급소’인 것이다. 친러시아계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친서방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자 러시아가 즉각 군사적 조치를 취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력 투입은 이중의 경고를 담는다. 다가오는 5월 조기대선에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경종과 함께,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서구가 배후에서 계속 키예프의 탈러시아화를 사주한다면 우크라이나 본토에 대한 침공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신호다.

러시아의 선제적 군사행동에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별다른 뾰쪽한 카드가 없다는 게 서구의 깊은 고민이다. 미국·독일·영국 등 서구 주요국들의 대러시아 제재 방안에 대한 뚜렷한 온도차도 효율적 대응을 어렵게 한다. 조지아·이란·시리아에 이어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자기 방식대로 스스로의 존재감을 거칠게 과시하는 러시아의 위상을 새삼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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