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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10 | 조회수 : 202

제목 : 브라질의 아랍인: 피난의 정박지가 성공의 정착지로 (2020.12.04) 글쓴이 : 중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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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국민들의 이주대상국’을 논할 때, 브라질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로 지난 수십년 동안 국내 아랍계 공동체의 규모가 1200만명 이상이 될 때까지 브라질은 이주민의 인파를 가장 많이 수용해 왔다.

아랍인들이 브라질로 떠난 역사는 19세기 중반, 구체적으로 1835년 베이루트의 가족구성원이 리우데자네이루(당시 국가의 수도)시로 이주하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모험심이 특히 강한 레바논계, 시리아계 아랍인들과 기타 국적을 가진 아랍인들이 산발적으로 이어서 이주하였다.

하지만 브라질 역사를 연구하는데 관심이 있는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역사적인 기록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아랍인들과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국가 관계는 16~17세기 브라질 진출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계 아랍인 무슬림 노예들을 브라질에 데려왔는데, 오늘날에도 “바이아(Bahia)”라 불리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으로 유명한 해안 도시에 거주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지명 ‘바이아’의 어원이 아랍어라고 보고 있고, 과거 아랍과 브라질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추측하고 있다. 이는 북부 해안도시 레시페(Recife)에 부두가 있기 때문에 그 어원이 아랍어 단어 “라시프(رصيف)”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하지만 아랍과 브라질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아우르는 학술적인 이해를 위해서, 이러한 자료들은 여전히 더 많은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신세계를 향하여

아랍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한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 일부는 병역기피를 위해, 오스만제국 말 경제적 사정이 악화돼서 이주를 하였다. 이들은 터키 여행증명서를 가져왔는데, 이를 본 브라질인들은 그들을 터키인을 의미하는 “투르쿠Turku”라고 불렀고 이 이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또다른 사람들은 세계대전과 위임통치, 그리고 팔레스타인 점령과 이것이 야기한 유혈분쟁 및 재난 이후에 해당 지역에서 시작된 전쟁을 피해 이주했다. 이러한 전쟁은 레바논 내전으로 이어졌고, 가족단위의 이주가 진행되어 브라질로 대규모 이민인파가 유입되었다.

위와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기에 맞물려 당시 브라질은 전세계에서 온 이주민들에 국경을 개방하고, 여러 정부에 요청하여 국민들이 소위 ‘신세계’로 오도록 장려하였으며 많은 특권을 부여하고 지원을 했다.

이러한 조치는 브라질의 마지막 황제인 '페드로 2세(Pedro II)’가 이집트와 샴 지역 등 중동을 방문한 이후에 더욱 강화되었다. 이전에 그는 포르투갈에서 아랍어를 배워, 이에 대한 애착이 있는 젊은 황제로 알려져 있었다.

일개 상인에서 부호로

아랍인들은 브라질 정부의 권유와 당국이 제공하는 특권에 호응하였고, 특히 모든 이민자 가구에 경작을 하고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토지를 제공한 것에 매력을 느꼈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특히 지방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계 아랍인들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기회였다. 이들은 오늘날 브라질 내 아랍 공동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할 수만 있다면 잠재력이 적든 상관하지 않고 모든 분야에 투자했다.

관광도시 플로리아노폴리스(Florianopolis)의 아랍공동체 의장이자 거상이며, 유명인사인 하지 마흐무드 후세인Haji Mahmoud Hussein(아부 라파트Abu Raafat)은 알자지라 넷에 브라질에서 있던 그의 이야기를 전한다. “아버지는 1940년대에 이스라엘의 점령이 시작되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있던 당신의 땅을 잃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당시 브라질 정부는 이민자들을 위해 국경개방을 할 것을 요르단 정부에 알렸었죠.”

또한 그는 “아버지가 레바논 항구에서 이민자들을 태운 대형 증기선을 타고 브라질에 가기 위해 석 달을 이동했습니다”고 덧붙였다.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 그(하지의 아버지)는 언어 상의 문제와 환경의 차이에 더불어, 수확을 위해 장기간 기다려야 하는 등 혼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때문에 아버지는 무역에 종사하기로 했죠. 먼저 이주해온 많은 아랍인들은 가방에 옷 여러 벌을 넣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옷을 나눠 팔았는데, 아버지도 이와 같은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부 라파트는 그 시절 인상깊었던 점 한가지를 언급했다. “아버지가 외상값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초상화 위에 손님의 이름과 외상값을 적고, 브라질 국적의 그들에게 간단한 포르투갈어로 ‘예수님께서 당신들이 이 빚을 갚는지 안 갚는지 알게 될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당시 그 사람들이 신앙심이 깊고 순진하게 살아왔던 것을 보고 했던 말이겠죠.”

무역사업이 번창하고 이 지역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지자 그 아버지는 자식들을 불러들여 같이 일하고 그들 만의 소규모 공동체를 건설하게 됐는데, 이 공동체는 날이 갈수록 성장하여 지역에서 가장 큰 단체가 되었고 도시에서 브라질 현지인들에게 임대할 만한 대규모의 부동산과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어서 아부 라파트는 알자지라 넷에 “이곳에 왔을 때 우리 가족은 단 6명이었지만,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150명이 넘는 대가족이 됐죠. 우리는 가족 구성원들이 중고등학교 교육과 대학교 교육을 받게 하고, 그들이 주변환경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도록 지역사회에 적절한 참여를 하게 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몇 가지 애로사항이 있었습니다만, 아랍의 정체성과 언어 및 문화를 보존하도록 가르치려고 노력했어요.”

아부 라파트와 그 가족의 일화는 레바논, 시리아계 등 여타 아랍공동체의 사연과 유사하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성공을 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데, 브라질 내의 이주민 공동체에서 가장 부유한 집단 중 하나가 될 정도였다.

‘개인’ 차원에서의 성공

브라질 특히 상파울루 거리와 마을 곳곳을 둘러보면, 아랍인들이 현지인들과 가진 긴밀한 관계와 이들이 수많은 영역에 끼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

정치면에서는 지난 선거(2018년 10월)에서 레바논계 후보 페르난도 하다드(Haddad)가 현 대통령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Jair Messias Bolsonaro)와 대선을 벌였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주(州)정부와 지자체, 사법부와 매스컴까지 여러 영역의 고위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말루프(Maalouf), 사드(Saad), 마즐룸(Mazloum) 가(家) 등 브라질 내 명망 있는 가문과 더불어, 당시 임시대통령 직 또한 레바논 출신의 미셰우 테메르(Michel Tamer)가 맡고 있었다.

문화적인 차원에서 볼 때 ‘킵바와 사피하’ 등 유명한 수많은 아랍의 음식들이 브라질 가정 식탁에 올라가는 주식의 일부가 되었다.

의학계의 성공사례 차원에서 보면, 중남미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성형외과 중 한 곳의 이름이 “레바논-시리아 병원”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많은 의학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 중 아랍인이 상당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가구, 직물, 의류, 심지어 가스회사 등의 영역에 특화된 아랍인과 아랍계 가문에 속한 거대기업들을 볼 수 있다. 중국 사업가들이 경쟁에 나서기 전까지, ‘March 25th’의 거리의 시장처럼 경제수도인 상파울루의 시장 전체가 “아랍 시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브라질의 여러 중요하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거리와 마을에, 아랍인들이 그들의 새로운 국가인 ‘브라질’에 기여를 한 것을 기념하여 ‘마리아 말루프(Maria Maalouf)’ 거리와 ‘살림 파라(Salim Farah)’ 거리, ‘레바논 공화국’ 거리와 ‘팔레스타인’ 거리 등 아랍계 유명인사나 아랍국가들의 이름이 붙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과 성과들은 아랍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일종의 준거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나왔는데, 이때 ‘준거기준’은 아랍인들의 일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우려하는 바를 전하거나 그들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한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매개체를 뜻한다.

이 주제에 대해 아메리카대륙 대화와 가르침을 위한 신앙센터장 셰이크 후삼 알 부스타니(Sheikh Husam Al-Bustani) 연구원은 “아랍인들은 개인 혹은 가족 차원에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고 모든 분야에서 눈에 띌 만한 계급에 도달하였으며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만 그 영향은 개인 차원에서만 존재했고, 아랍 공동체 전체에는 큰 이득이 되지 않으며 각자의 이익에 그쳤죠.”

또한 준거기준이 없는 것에 대해서 알부스타니는 알자지라 넷에 “브라질에서 지금껏 아랍공동체의 대표기관 혹은 준거기준을 만들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실패했고, 그 이유는 간단하게 말하면 아랍인들이 아랍국가에서 단결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때문에 아랍 공동체들이 새로 이주한 국가에서도 동일한 문제와 갈등이 나타났죠.”라고 덧붙였다.

브라질에서 25년을 보낸 이 연구원은 “브라질에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넓은 지리적 규모와 자신과 가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또한 그는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준거기준을 마련하고,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모든 사회영역과 진정한 파트너십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새로운 이주정착지

브라질이 종전에 아랍 분쟁과 전쟁의 여파를 피해 도망친 아랍인들의 목적지였다.  또한 망명과 정착을 위한 국경개방을 보장하는 인도주의 법안이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아랍의 봄에 영향을 받은 국가에서 위기가 발발한 이래로 브라질은 분쟁의 현장에서 멀고 안전한 장소를 찾는 사람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브라질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시민권과 영주권을 부여하고, 이후 그 아이의 가족에게도 국적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해 공신력 있는 대체 국적을 획득하기 위한 국가로서 많은 가족들이 브라질을 선택하였다.

지난 7년 동안 브라질로 온 아랍 이주민들의 인구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관측원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분명히 다가왔다. 일부 이주민들은 지역 내 정착한 아랍인들에게 도움을 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나머지는 새 나라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단을 찾지 못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동체 내에서 사회 운동 체계를 설립해 나갔다. 브라질은 새로운 이주자들이 느끼는 상당한 문화차이와 함께 복잡한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는 점, 생활비가 높고 적절한 일자리 확보가 어렵다는 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국가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특히 브라질 정부가 그들에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더욱 그들의 이주생활을 힘들게 하는 요소이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몇몇 이주민들의 성공사례가 있다. 이들은 브라질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브라질 난민 월드컵 창립자인 압델 바세트 자루르(Abdel Basset Jarour)는 알자지라 넷에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자루르는 “2013년에 저와 제 가족은 시리아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도망칠 수 있었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어요. 저는 여러 나라에 비자를 신청해 봤지만, 브라질만이 저에게 기회를 줬습니다. ‘브라질’ 하면 축구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이 새로운 세계에 온 거죠.”라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고집스럽게 계속 살아나갔어요. 브라질 사회에 제대로 동화되어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했죠. 또한 친구들과 함께 ‘난민 월드컵’ 대회를 시작하겠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어요. 실제로 저는 브라질 내에서 이 대회에 대해 호감과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와 제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공식적 지원이 있었고 미디어의 도움도 받게 됐을 때 이 사실을 알 수 있었죠. 브라질에서 짧은 기간 내에 큰 성공을 거두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저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얻었고, 브라질이 정말 저의 나라가 됐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어요.”

브라질을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아랍인들이 가진 큰 존재감과 그들이 남긴 업적은 브라질의 역사와 현시대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난민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새로운 아랍세력의 존폐를 위협할 수 있는 극우정권 통치 하에, 아랍세계와 브라질의 향후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의문이 제기된다. 해당 정권은 주 이스라엘 브라질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등 아랍의 민중들에게 도발적인 조치를 약속하기도 했다.

브라질과 아랍 민족 간의 훈훈했던 역사적 관계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서, 브라질 사회는 선한 영향력을 끼쳐온 이 거대한 공동체의 능력에 여전히 크게 의존하고 있다.

출처: " العرب في البرازيل.. من مرفأ لجوء إلى محطة نجاح "حسان مسعود, Aljazeera.net, Jan 20, 2019

https://www.aljazeera.net/news/politics/2019/1/20/%D8%B9%D8%B1%D8%A8-%D8%A8%D8%B1%D8%A7%D8%B2%D9%8A%D9%84-%D9%87%D8%AC%D8%B1%D8%A9-%D9%85%D8%B3%D9%84%D9%85%D9%88%D9%86-%D9%81%D9%84%D8%B3%D8%B7%D9%8A%D9%86-%D9%84%D8%A8%D9%86%D8%A7%D9%86

기사날짜: 2019.01.20(검색일: 202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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