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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6.07 | 조회수 : 415

제목 : 《6.6》[세상읽기] 톈안먼사태 23주년, 벗어야 할 굴레 ─ 매일경제 기고 글쓴이 : paxsi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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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해마다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1989년에 일어난 6ㆍ4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유령에 시달린다. 23주년을 맞은 올해 역시 예외가 아니다. 톈안먼 사태 피해자들의 유족이나 해외의 중국 유학생 단체들은 톈안먼 사건 재평가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으며 미국 등 서방 국가는 인권 문제 차원에서 중국을 계속 압박하고 있다. 이런 소식들은 인터넷 시대에 다양한 루트를 거쳐 중국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전달되고 있다.

전시업무체제를 가동할 정도로 긴장한 중국 당국의 노력으로 이번에도 표면적으로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큰 동요 없이 지나갔고, 당국 역시 일단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미래 10년 권력의 정권 교체를 앞둔 올해의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으로 복잡하다. 연초부터 왕리쥔(王立軍),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을 비롯해 천광청(陳光誠) 변호사의 미국 대사관 도피 등 중국 정치의 후진성과 관련된 많은 정치적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들 사건은 지난 30여 년 중국의 발전을 이끌어온 개혁개방의 성과에 따른 중국의 부상과 세계적 국가 중국의 가능성에 강력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톈안먼 사태는 1989년 4월 15일, 급진 개혁파였던 전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을 추모하는 집회로 시작돼 5월 13일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들의 단식 연좌시위로 확대되고 노동자와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애초의 반부패 척결 운동, 개혁개방 심화 운동에서 100만명이 넘는 대규모의 정치성을 띤 민주운동으로 확산되면서 시작됐다. 중국 당국은 이를 `반혁명 폭란` 사건으로 규정해 베이징시에 계엄을 선포하고 6월 3일 밤 인민해방군을 투입해 비무장 시민들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는 실각했고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체제가 구축됐다.

톈안먼 사태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반혁명 분자들을 강력 진압할 수밖에 없는 정책적 선택이었다는 중국 당국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치의 비인도적 전근대성과 전체주의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처럼 톈안먼 사태는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의 결정적 오점으로 남았다. 이 문제를 짚지 못하면 중국은 국내외적으로 민주와 인권이라는 보편가치를 무시하는 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현재의 중국과 중국인들은 이전과 다르다. 여전히 공산당이 절대권력을 갖는 당국체제(Party-State System)를 유지하고 있지만, 민도가 과거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성장했고 중국 역시 세계적 국가로 컸다. 국제사회와 인민들을 모두 설득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이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으며 국제사회도 중국의 책임을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가시적인 정치개혁의 성과가 도출돼야 한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논의된 정치개혁은 경제 발전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행정관리 체제의 성격이 강했다. 중국의 관료나 지식인들의 지적처럼 법치가 가능한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다.

10월 출범을 앞둔 시진핑(習近平)-리커창(李克强) 체제는 적어도 장쩌민, 후진타오 체제보다는 톈안먼 사태에서 자유롭다. 덩샤오핑의 그림자를 벗어나기는 어렵지만 덩이 마오쩌둥 재평가를 통해 개혁개방을 추진한 것처럼 새 체제가 여하히 톈안먼 사태를 재평가할 수 있는가가 미래 중국의 정치 안정과 세계적 국가 중국의 지속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강준영 한국외대 중국정치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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