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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12.04 | 조회수 : 1004

제목 : [07.12.04]“순수한 상아탑만으론 세계의 대학과 경쟁 못해” 글쓴이 : 교수학습개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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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한 상아탑만으론 세계의 대학과 경쟁 못해”

   고려대 주최 ‘대학 이념과 비전’ 토론회

기업 연구개발 비용 중 대학에 대한 투자는 2%뿐
미국인 93%가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대학을 꼽아
기업은 대학에 투자, 대학은 산업계 요구에 부응을

‘입시’와 ‘취업’ 문제가 대학의 주요 관심사를 점령하고 있는 21세기 초 한국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인재를 양성한다’는 대학 본연의 사명은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다. 고려대가 30일 개최한 ‘제1회 학문과 사회 대토론회(KU Open Debate)’는 바로 이런 대학의 본질적인 문제를 대학 내부의 시각에서 성찰하기 위해 ‘대학의 이념과 비전’을 주제로 삼았다.

한승주(韓昇洲) 고려대 총장서리, 손병두(孫炳斗) 서강대 총장, 이배용(李培鎔) 이화여대 총장, 김우창(金禹昌) 고려대 명예교수, 현재천(玄在天) 고려대 화공생명공학과 교수와 같은 주요 대학의 최고 책임자와 석학들이 토론에 참여했다. ‘진리탐구’와 ‘실용’을 둘러싼 인문학 전공자들과 사회과학·경영학 전공자들의 의견차가 미묘한 긴장감을 빚어내는 한편, 자연과학 전공자는 통섭(統攝)의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미래의 대학이 세계화와 선의의 경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모든 참석자들이 동의했다. 이들의 주요 토론 내용을 소개한다.


◆기업은 시속 100마일, 한국 대학은 겨우 1마일


이배용=대학의 역사를 보면 진리의 탐구라는 핵심적인 가치를 잃어버리고 시대와 야합해서 종속했을 때 스스로의 역할을 떨어뜨려 왔다. 대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의 해답은 자유로운 학문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살리는 것이다. 사회와의 이해관계 속에서 객관성을 유지할 때 대학의 순수학문 기능이 살아난다. 산소 같고 물결 같은 부드러운 힘으로 세상의 문명을 이끌어가는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소설가 박경리 선생을 만났는데 ‘왜 인간들은 새들이 노래한다고만 생각하느냐’고 하시더라. 성찰과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가능할 때 인류의 평화가 오는 것인데, 대학은 인간의 욕망과 오만을 잡아줄 수 있는 절제와 자정능력의 중심축을 심어 줘야 한다. 기업은 단기차익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없다.

김우창=대학이 제대로 살려면 다른 무엇보다 지식 그 자체에 봉사해야 한다. 진리탐구를 무시하고 산업과 경제에 봉사한다면 인간 존엄성에 대한 훼손이 생길 수 있다. 표절 문제나 과학에서의 엉터리 실적 같은 것은 진리가 너무나 실용적인 관점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진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도덕적 결단을 통해 거짓을 배제하는 것이다. 예전 서당 훈장에게 ‘쌀 가마를 받으려면 잘 가르치라’고 하지는 않았다. ‘잘 가르치기 때문에 쌀 가마를 주는 것’이었다. 앞의 시각은 물질적 가치에 학문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논문을 통한 교수평가 제도에도 진리의 존엄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 지난 30일 고려대 100주년기념관에서‘대학의 이념과 비전’을 주제로 제1회 학문과 사회 대토론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손병두 서강대 총장, 이배용 이화여대 총장, 권대봉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사회자), 한승주 고려대 총장서리, 현재천 고려대 교수.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한승주=대학은 인재를 양성하고 지식을 창출 전달하고 리더십을 배양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흔히 대학을 ‘상아탑’이라고 하지만 정말 상아로만 탑을 만든다면 보기는 좋지만 실용성은 없을 것이다. 인성교육을 강조하느냐 실용적인 교육을 강조하느냐 하는 것은 균형의 문제이지 선택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성과 실용을 다 강조할지, 실용적인 면을 강조할지는 그 대학이 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것이 더 낫다기보다는 한 사회에 두 가지 형태의 대학들이 다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입학 후에도 학생이 어떤 교육을 받겠다는 선택이 있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졸업 후 취직이나 진학을 도와주는 구체적인 도움 외에도 앞으로의 일생에서 닥칠 도전과 변화를 감당할 수 있게 교육하는 것이 대학의 의무다.

손병두=대학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하다 보니 전인교육(全人敎育)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반성해야 하고, 지식보다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대학이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학생들을 건학 이념에 따라서 지도하기 위해선 상당한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 총장이 되기 전 기업에 있을 때는 대학에 불만이 많았다. ‘기업은 리콜 제도가 있는데 왜 대학은 없느냐’고 말한 기업 회장도 있었다. 앨빈 토플러는 ‘기업은 시속 100마일로 달리는데 대학은 10마일로 달리고 있다’고 했다. 한국 대학은 겨우 1마일 정도가 아닐까. 연구와 교육이라는 두 가지가 대학에서 조화롭게 이뤄져야 한다. 대학이 정말로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 그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하지 않는다면 대학으로서의 기능이 있을 수 없다.

현재천=대학에서의 ‘진리탐구’와 ‘실용주의’를 따로 떨어진 개념으로 이해할 게 아니라 같은 동전의 앞과 뒤라고 통괄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동전의 이름은 ‘문명’이다. 복잡다단한 문제와 과제 속에서 대학의 기본은 문명과 리더십이라고 본다. 문명에 기여할 지도자를 양성하고, 이를 통해 문명의 부가가치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대학의 본질적인 과제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인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문명을 넘어서 ‘어떻게 건강하고 재미있게 사느냐’가 주제가 되는 문명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대학이 깨달아야 한다.

◆기업은 왜 대학생 인턴 사원을 안 받아주는가

한승주=대학의 세계화는 국가의 세계화와 경쟁력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대학 자체의 존립·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세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교육 지식과 광범위한 철학을 알아야 하며, 평가기관이 표준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제 경쟁상대는 국내가 아닌 세계의 대학들이다. 요즘 총장을 CEO(최고경영자)라 하듯이 대학들은 기업화되고 있고, 미래를 지향하고 변화에 대응하면서 실용적으로 돼 가고 있다. 공간적인 세계화는 시간적으로는 미래화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의 자원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는 질문에 미국인들의 93%가 ‘대학’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반면 우리는 대학이 특권층을 만든다는 관념에 비해 사회에 기여를 한다는 인식이 없는 점을 고민해야 한다.

김우창=대학의 순위를 매기는 데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미국에서 하버드대나 예일대가 좋은 대학이라고 할 때 특정한 부문에서 업적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전체 분위기가 좋다는 것이다. 순위란 것은 수량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절대화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것보다는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가치가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기업은 ‘졸업생들이 인간적인 수련이 안 됐다’고 하는데 이걸 고치려면 대학에서의 자유로운 목적을 위해 쓰이도록 투자되는 돈이 있어야 한다. 지나치게 특정한 분야에만 투자를 하거나 기술적 발전만 위해 노력해서는 안 된다. 인류 평화의 기여 같은 것은 인간적 가치의 문제다. 우리나라에서 도덕적 기준과 과학적 엄밀성을 교육할 수 있는 곳은 대학뿐이다.

손병두=우리나라 여건상 인본주의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대학을 운용하기는 어렵고, 학부모들이 아무래도 순위 좋은 대학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계량적인 경쟁력도 무시할 수 없다. 기업도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기업 R&D(연구개발) 비용 중에서 대학 투자는 2%뿐이다. 기업에 인턴사원을 받아줄 수 있느냐고 하면 기피하기 일쑤다. 산학 협동과정이 필요하다고 말만 하면서 구체적으로는 못 하고 있다. 세계 100대 대학에 왜 서울대만 들어 있느냐고 하지만 정말 선진국 수준의 투자와 자율성을 줬다면 우리 대학이 지겠는가  기업은 투자하고 대학은 산업계의 요구에 부응할 교과과정을 핵심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이배용=세계화를 왜 하느냐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 이 시대 세계화의 궁극적 과제다. 학문의 비판과 수용, 부정과 긍정이 작용하는 가운데 서로를 이해하고 알고 존중하는 다문화적 소양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 역사의 길이가 길수록 미래에 비치는 빛의 길이도 길다. 미국 중심의 세계화는 또 하나의 안주(安住)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우리가 짚어야 한다.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깊은 통찰을 길러주는 대학교육의 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천=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경쟁’이란 것이 좋지 않은 개념인 것처럼 착각한다. 경쟁이란 자연의 법칙이고 생명이 잉태해서 죽을 때까지 그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경쟁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대학의 경쟁력이 국가와 개인의 경쟁력임을 깨닫고 선의의 경쟁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이 모금활동을 하면서 내걸었던 ‘인간의 건강’ ‘환경·에너지의 지속가능성’ ‘세계평화와 안전’이라는 목표는 인문·사회·자연과학과 공학이 문명적 차원에서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 같은 역사왜곡과 한국이 처한 위기의 상황에서 역사적 인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려면 인문에 기반을 둔 국제경쟁력이 필요하다.

●토론 참석자 약력 

한승주 서울대, 캘리포니아대(정치학박사), 외무부장관, 주미대사, 현 고려대 총장서리

손병두 서울대, 한양대(경영학박사), 전경련 부회장·상임고문, 현 서강대 총장

이배용 이화여대, 서강대(문학박사), 이화여대 인문대학장, 현 이화여대 총장

김우창 서울대, 하버드대(문학박사), 고려대 대학원장, 현 고려대 명예교수

현재천 서울대, 미네소타대(화학공학박사), 고려대 대학원장, 현 고려대 화공생명공학과 교수




[조선일보]
정리=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07.12.04 00:05 / 수정 : 2007.12.04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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