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의의
2015년 올해는 한국의 세르반테스 연구자들에게는 실로 특별한 한 해이다. 육당 최남선이 처음으로 《청춘》지에 우리말로 《돈키호테》를 소개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 2편을 완간함으로써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완성한 지 정확히 4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르반테스 서거 4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있어, 지난 연말 최초로 한국에서도 세르반테스 연구소가 발족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연구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세르반테스 연구소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된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철 교수는 스페인 왕립한림원 종신회원이자 한림원 학술지 《뷸리틴》의 편집위원으로, 2004년 제11차 세계 세르반테스 학회 서울 개최를 성공시키는 등 아시아권의 대표적인 세르반테스 연구학자로 활약해오고 있다. 또한 같은 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돈키호테》 1편을 스페인어에서 완역, 그간 일본어나 영어판 중역 또는 요약본 번역에 머물러 있던 《돈키호테》 번역사에 큰 획을 그은 바 있다. 당시 고전 작품으로는 드물게 독자들이 뽑은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박철 교수의 번역이 올해 2편 《재치 있는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완역본 출간으로 10년간의 기나긴 준비 작업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스페인 왕립한림원이 펴낸 400주년 기념판본을 번역대본으로 하여, 한림원 초판본을 비롯한 주요 판본들을 참고로 번역의 완성도를 높인 이번 판본에서는 세밀한 묘사와 극적인 구도로 세르반테스의 상상력을 생생하게 구현한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 85점과 18세기 한림원 초판본의 장식 그림등 독자들의 읽는 즐거움을 더해줄 귀중한 자료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작품 소개
2편에 새로이 등장한 캐릭터인 학사 산손 카라스코가 책 속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세간에는 “[걸작의] 후편이 더 좋았던 적은 없다”, “돈키호테에 관한 일들은 이미 쓰인 것만으로도 충분해”라고 말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르반테스가 생을 마감하기 1년 전,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완성한 《돈키호테》 2편 《재치 있는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아주 특별한 작품이다. 20세기의 대표 작가들이 인류 최고의 소설로 꼽은 저 대단한 1편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되지만 그렇지가 않다. 더 많은 것을 더 즐겁게 보여준다. 이제는 주인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선, 하지만 여전히 그 광기의 1차 희생자인 산초 판사와 본인이 꿈꾸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온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가 되어버린 돈키호테, 이 세기의 짝꿍이 벌이는 모험 아닌 모험들을 따라가다 보면 900여 페이지가 어느새 훌쩍 넘어가 버린다. 당시 스페인 국왕이었던 펠리페 3세가 길에서 책을 읽으며 울다가 웃다가 하는 사람을 보고 “저건 미친놈이 아니라면, 분명 《돈키호테》를 읽는 중이로군” 했다는 말이 2편을 읽다 보면 실감이 난다.
업그레이드된 캐릭터와 재미 외에도 2편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1편이 출간되어 전 유럽을 휩쓴 이후 출간된 2편에서는 작품 속에서조차 모든 사람이 돈키호테의 모험담을 줄줄 외운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던 시골귀족 돈키호테는 이제 유명인사에 이름난 기사이다(그렇기에 제목도 ‘시골귀족’에서 ‘기사’로 바뀌어 있다). 그 명성의 이유가 그의 생각과는 다를 뿐이다. 2편에 추가된 핵심 인물이자 어찌 보면 당시 독자들의 대표 격인 공작 부부를 비롯하여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책에서 읽은 그의 모험담에 끼고 싶어 안달이다. 공작 부부는 수십 명의 하인들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성을 돈키호테의 공상 속 무대로 꾸미고 기사도 책에 나온 유명한 일화들을 지나치리 만큼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그 모습을 기록해나가던 작가가, 본인이 나서서 도대체 누가 미치광이인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다. 그에 반해 돈키호테는 너무나 ‘멀쩡한’ 미치광이로 더 이상 주막을 성으로 보지도 않고 시골 아낙을 공주로 보지도 않으며, 대화를 할 때면 누구나 귀 기울일 만한 말을 신중히 들려준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섬을 하사받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산초에게 그가 한 충고들을 보면 지금의 공직자들도 읽고 외우게 하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사실 2편에서 그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산초 판사로, 이제 그는 자신의 주인이 미치광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때로는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안다. 글도 읽지 못하지만 속담은 주인보다 더 잘 꿰고 섬의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는 공작 부부가 미리 짜둔 수수께끼 같은 송사들을 척척 해결해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둘도 없는 종자 산초 판사다. 주인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자 완력으로 제압할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해졌고 이 말도 안 되는 모험 길에서도 급료는 착실하게 챙길 생각인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지만, 그는 한 번도 자기 주인의 꿈을 부정하거나 놀림감으로 삼지 않으며 그의 광기 속에 담긴 진심을 알기에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주인을 버릴 수 없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화신인 두 캐릭터는 2편에서 한층 강해지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해나간다. 그리고 그 둘을 그려내는 ‘재치 있는 작가’ 세르반테스는 작가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다채로운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창의적인 형식과 다양한 기법들, 무엇보다 빛나는 재치와 삶에 대한 통찰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그의 글을 읽어나가다 보면 왜 모든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가장 위대한 소설로 꼽는지 이해할 수 있다.